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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금산성전투...금산문화원(금산임진왜란사연구원)6. 제2차 금산성 전투에서 조헌 선생과 영규대사 순절하다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 안내도

조헌 선생은 1544년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서 태어나 호를 중봉이라 하였다. 명종 21년(1566)에 함경도 온성도호부 훈도에 제수되고 1년 뒤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부정자에 제수되어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하였다. 선조 원년(1568)에 정주목의 교수를 거친 뒤 파주목의 교수, 선조 4년에 홍주목의 교수로 부임하여 토정 선생을 만나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교류하였다. 선조 17년(1584)에 붕당간의 정쟁으로 파직된 중봉은 서울을 떠나 옥천군 안읍 밤티 산속에 후율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하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임진왜란이 있기 전부터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대비할 것을 강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5월 3일, 옥천에서 열읍에 격문을 돌려 향병 수백을 모아 의병운동에 나섰다. 자신의 문인 김절, 김약, 박충검 등과 더불어 1,00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7월 4일 공주에서 기치를 세우고 호서의병을 대표하는 창의기병을 하였다.

권율 장군의 동상과 임진왜란에 참전한(관군, 승려, 의병, 여성) 백성에 애한 전각 기념비

영규대사는 속성이 박씨로서 공주 판치 사람이었는데 일찍이 계룡산에 입산하여 서산대사의 법문에 들어가 호를 기허당이라 하였다. 뒤에 서봉사, 갑사 등의 주지를 지낸 뒤 공주 청련암에서 무예를 연마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전란이 있을 것으로 예측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국적인 승군이 모집된 것은 조정에서 승통을 설치하고 승군을 모집하기 위하여 묘향산에 있는 휴정을 부른 이후 1592년 7월부터이다. 영규는 임진왜란 때의 의승군 중에서 가장 먼저 갑사에서 수백명이 봉기하였다.

권율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충장사에서 묵념하는 회원들

당시 왜군이 천안, 직산 등지를 제외한 충청도 동부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였고 순찰사 윤선각의 질시로 인해 조헌의 의병활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그러나 조헌을 주축으로 한 호서의병이 공주의 승장 영규와 적극적인 협력으로 청주성 수복전투에 임하였다. 당초 호남의병장 고경명과 협력하여 근왕을 위해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미 고경명이 7월 10일 금산성1차 전투에서 순절하여 관군 등과 협력하여 청주성 전투에 임한 것이다.

권율 장군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대첩비각을 살펴보는 회원들

당시 방어사 이옥은 연기현 동쪽에 진을 치고 있다가 7월 말경에 청주 쪽으로 진출하였고, 승장 영규는 청주성 15리 밖 안심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승군은 청주성 빙고현에 의병군과 합류하여 8월 1일 서문을 공격하였다. 수차례 공격을 하였으나 소나기가 내려 군사를 물러가게 하였지만 성중의 적들은 지속적인 관의승연합군 공격으로 그날 밤 그들의 시체를 태운 뒤 깃대를 세워 군사처럼 보이게 한 뒤 모두 성을 빠져 나갔다. 날이 밝기 전에 성안에 진주한 관의승연합군은 무혈로 청주성 수복에 성공하였다.

권율 장군 기념관의 내부를 둘러보는 회원들

청주성을 수복함으로서 도내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의 주력을 몰아낸 조헌은 이제 의병활동의 목표를 근왕하는 데 두어 북상하려 하였다. 온양에 이르렀을 때 금산을 점령한 적세가 매우 위급함을 알고 양호의 순찰사로부터 먼저 금산을 공격할 것을 요청받게 되어 전열정비를 위해 공주로 돌아갔다. 공주에 돌아오니 휘하의 군사들 다수가 순찰사의 방해공작으로 모두 흩어지고 700명의 의병만이 종군을 결의하였다. 이에 앞서 전라도순찰사 권율과 8월 18일을 기하여 금산을 향해 일제히 협공할 것을 약속하였다. 중봉은 8월 16일 회덕을 거쳐 유성으로 진군하여 다시 승병 영규군과 합세하고 금산성으로 향하였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길봉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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