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내민 책 한 권] 여자 조기 축구에 대한 신들린 기록

작가가 어찌나 글을 구어체로 잘 쓰는지, 마치 옆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것 같다. 재잘재잘 시끄러운데 얘기가 하도 흥미진진해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자 김혼비의 글발에 말 그대로 혼비백산한 기분이다. 에세이인데 소설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소재가 특이하고 전개가 극적이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축구를 좋아한 김혼비는 왜 나는 선수들처럼 피치(그라운드)를 뛰어다닐 생각을 못 했는지 의아했다. 그녀는 동호회를 물색하고 '초보자 환영'이라고 밝힌 축구 클럽에 홀린 듯 전화하지만, 급 후회한다(저자는 글은 수다스럽지만, 현실에서는 소심한 것 같다). 후보 선수를 거쳐 어느덧 경기에서 어시스트까지 한다. 그러니까, 책 내용은 실화다.

40~50대 아줌마들이 주축인 여자 축구 동호회가 이렇듯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로 구성된 시니어 축구 클럽들도 꽤 많고(여자 축구 클럽은 시니어 클럽과 주로 대전한다) 주 2회 정도 만나서 어딘가의 피치를 누비고 있다는 것도 놀랍다.

축구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나는 축구 용어에 해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리프팅은 정확하게는 키피업(Keepy-up), 뻥축구는 킥앤드러시, 시뮬레이션 액션(할리우드 액션), 월패스, 아웃사이드 드리블, 리바운드(주워 먹기, 세컨드볼), 오프더볼(공 없을 때 공간 창출하기), 다이버(누워 있기)의 전략적 가치, 신가드(Shin guard, 정강이 보호대), 등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스로인 규칙(두 발은 지면에, 공은 머리 위에서 놓아야 한다)도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 과 대항 축구 대회에 얼결에 선수로 나갔다가(우리 과는 신설과여서 가용 인원이 별로 없었다) 1회전에서 무참히 탈락한 쪽팔린 경험이 있다. 그때 스로인 반칙을 지적받고 매우 무안했던 적이 있었다. 심판은 무엇이 반칙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책을 보고 당시 나는 머리 위가 아닌 얼굴 정도 높이에서 공을 던졌다는 걸 알았다.

이 책은 페미니즘 도서이기도 하다. 시니어 팀과 축구를 하면 ‘설명충’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자는 당연히 '축알못(축구 모르는 사람)'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아저씨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거의 평생 축구를 한 ‘선출(선수 출신)’에게까지 '맨스플레인(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권위적인 태도로, 아랫사람을 훈계하듯이 설명해 주는 것)'을 한다. 그러면 그녀들은 전투력을 끌어올려 상대를 발라버린다. 그렇다. 남자들만 축구(스포츠)를 좋아하고 그걸 제대로 이해하고 즐긴다는 것은 편견이다. 앞으로 조심하자.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팀원(여성)이 야구 좋아한다고 하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누구를 좋아하냐고 묻고 아는 척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 잘하긴 하지만, 클러치 능력이 떨어지지 않나?” 그 장면이 떠올라서 창피했다. 그 친구는 김재현 선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팬클럽이었으니까. 나도 잘난 척하는 남자들과 별반 다름없었다. 나보다 잘생긴 김재현을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축구를 하고 여자들은 피구나 발야구를 하는 현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지적한다. 여자들은 그렇게 교육받고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내가 있는 대안학교에서는 여자축구 동아리도 있고 그들도 남자애들과 동일하게 피치를 밟고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그러나 축구 자체는 복싱처럼 점점 인기를 잃고 있다. 구경꾼은 많아질지 몰라도 하는 사람은 줄고 있다. 학생들도 땀 흘리며 두 발로 무식하게 뛰어다니는 운동인 축구, 정직한 게 매력인 이 운동을 즐기는 애들은 줄고 있다. 안타깝다.

어렸을 때 나는 일요일 아침에 조기 축구 중인 아빠를 부르러 가곤 했다.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날렵한 몸놀림 후 토킥으로 멋지게 골을 넣는 아빠는 참 멋졌다. 막걸리를 한 잔 걸치고 혈색 좋은 얼굴로 엄마가 요리한 돼지김치찌개를 가족과 둘러앉아 맛있게 드시지 않았을까? 엄마는 조기 축구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당신처럼 뽀글 파마를 한 이웃 아줌마들과 10원짜리 고스톱 치는 걸 좋아했다.

?남자들은 결혼해도 조기축구를 계속 뛰지만, 여자들은 아이를 갖는 순간 동호회 활동을 쉴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출산과 육아 모두 여전히, 주로, 엄마들의 몫이다. 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생 정도가 되어야 다시 피치로 돌아올 수 있다. 남편들이 이런 부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아내가 조기축구를 뛸 수 있도록, 저녁에 하는 배구 동호회에도, 배드민턴 동호회에도, 탁구 동호회에도, 오후에 있는 볼링 동호회에도 가서 땀 흘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뭉쳐야 찬다’, ‘핸섬 타이거즈’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뭉쳐야 찬다는 테리우스 안정환이 감독을 맡고 스포츠 영웅들(이형택, 이봉주, 여홍철 등)이 열심히 피치를 뛰어다니면서 한 팀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핸섬 타이거즈는 국보센터 서장훈이 감독을 맡고 젊은 남자 연예인들이 사회인 리그를 뛰는 모습을 보여준다. 모두 남자들이다. 뭉쳐야 찬다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여성 스포츠 전설들로 구성해서 여자 축구를 조명했으면 훨씬 의미도 있고 파급력도 클 것 같아서 아쉽다. 훌륭한 남성들도 많지만, 훌륭한 여성들은 더 많고, 그들은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아닌 엄마가 피치에서 토킥으로 멋지게 골을 넣고 세레모니를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김혼비 작가는 축구 동호회의 일상을 축구 규칙과 용어로 빗대 매우 유쾌하고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흡입력이 너무 강해서 정신없이 읽었다. 이 사람의 세세한 기억력, 그리고 역동적 서술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이여, TV 중계만 보지 말고 피치로 나서 보자. 우리는 모두 관중석이 아니라 피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독자 이덕래

금산신문 gsnews47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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