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가는 길이다.
수출용 화물 확인을 위해 부산에서 기다리는 일본인 거래선과의 약속으로 이른 KTX를 탔다.
아침 6시59분 대전역을 출발했다.
10시 부산시 동래구의 한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일찍 서둘러야 했다.
이른 아침이지만 날씨는 겨울답지 않다.
기온이 높기에 짙은 안개가 내렸다.
KTX는 안개 낀 어둠을 밀어내며 부산으로 달린다.
조용한 객차안.
사람들 보다 빈 좌석수가 더 많아 보인다. 음료를 파는 아가씨도 조용조용 이동한다.
원두커피 한잔 테이블에 올려놓고 어둠이 가시는 밖을 주시한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안개가 맺혀 서리꽃을 피웠다. 겨울 산속은 훤하다.
나무들이 발가벗었다. 앙상한 뼈대를 보여주는 듯 하다.
단지 소나무만이 푸르른 솔잎을 군계일학 처럼 드문드문 보여준다.
벌써 삼랑진을 지난다.
대전→부산간이 두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예전에 비하면 참 빠른편이지만 실내에서의 느낌은 예전이나 별 다른 느낌이 없다.
기차길 옆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정말 여유로운 흐름이다. 아니 정체된 연못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요한 수면 위로 물안개가 살포시 피어오른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 자체다.
햇살내리기 전까지 물안개는 머물고 있으리라.
야생오리들이 미동없이 물위에 떠있다.
마치 물을 방석삼아 잠든 모습처럼 보여진다.
기차의 덜컹이는 소리도 늘 들려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나 보다.
그 옆에 하얀 왜가리 한 마리가 한쪽 다리를 가슴털에 넣은채 한 발로 서있다.
발이 시린가 보다.
강 주변엔 비닐하우스가 즐비하다.
저 하우스 속에는 푸른 잎새들이 자라고 있으리라.
낮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닐을 통해 들어오고 밤에는 연탄불로 난방이라도 하는가보다.
중간 중간에 난로 연통으로 보이는 굴뚝이 있다.
그리고 부지런한 나이드신 농부들이 긴 장화를 신고 그 사이를 오가신다.
아주 옛날엔 못 살았지만 겨울에는 농한기였다.
꽁꽁 얼어버린 땅위에서 나무하는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사시사철 일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할 일이 있어 쉴날이 없다.
KTX는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부산역에 도착하고 서둘러 온천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출근시간대가 지난 9시10분.
지하철은 빈자석이 있을 정도로 한가롭다.
값싸고, 빠르고, 막힘이 없는 지하철.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에 지하철이 지금도 없었다면 아마도 교통이 마비되지 않았을까?
도심은 땅속, 땅위, 하늘까지 모두가 분주하기만 하다.
출근시간이 지나서일까, 대부분 승객들이 등산복 차림의 나이드신 분들이다.
젊은이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삼삼오오 가벼운 배낭 메고 계신것을 보면 아마도 가까운 산이라도 오르실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해 출구를 빠져나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10시에 만나 11시경에 양산 콘테이너 야드에서 물건을 확인하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부두에서 물건을 내리지 못했단다.
빨라야 오후 2시경이라는 연락이다.
맥이 확 풀린다. 그러면 어제 저녁에라도 연락주었으면 약속시간이라도 정정했을 것인데.
새벽부터 서둘러 내려온 자신도 그렇지만 호텔에서 기다리는 일본인 거래선에게 무어라고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약속」
사람이 서로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첫 번째 의무이다.
일본사람들은 정말 약속을 잘지킨다.
시간 약속이라면 거의 분단위까지 맞추어 나타난다.
모든 부문에서 사전 예약시스템으로 운영되는게 보편화 되어있다.
식사, 호텔, 교통편 등 모두를 사전에 확인하고 예약해두니 무작정 갔다가 기다리는것 같은 폐해는 없다.
우리는 어떤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5~10분 늦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차가 밀렸다는 핑계로 정당화 하려 한다.
교통조건을 감안해서 일찍 출발해야 한다.
차가 밀렸다는 것은 핑계일뿐이다.
열명이 약속을 했을 경우 한사람이 10분 늦었다면 나머지 9명이 10분씩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는 손해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또 음식점에 가 보면 모두가 바쁘다.
손님들은 독촉하는 사람뿐이다. 그토록 바쁘면 사전예약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고 큰소리를 낸다. 서두르기만 할 뿐이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이제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는 문화국민이기에 약속, 예약문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선진국이라는 것은 국민소득만 높아지는게 아니다.
모든 문화수준이 소득에 걸맞게 따라가야 한다.
나로 인해 남이 기다리지 않도록 약속된 시간은 철저히 지켜야 하고 그렇지 못할 상황이 발생시는 그 상황에서 바로 연락을 해 주어야 한다.
참 좋은시대 아닌가.
거의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는 휴대폰 세상이 되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공항여객 터미널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데서 이제 비행기 출발이나 버스 출발시 미 탑승자에 대한 안내방송은 없어져야 한다.
그것도 일종의 소음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내방송 없이 출발하는 것이 정례화되어야 한다.
그러면 모두가 지정된 시간에 탑승하지 않을까?
문화시민으로 한걸음 다가서는 2007년이 되었으면 한다.
11시 약속이 오후 2시로 변경되었으니 식사시간을 포함해서 3시간의 여유가 있다.
나야 같은 나라사람이라 이해 할 수 있지만 일본인에겐 무어라고 상황설명을 해야 하나?
벌써 2주전 약속이 정해졌고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사실대로 얘기하고 그 시간에 동래근처에 있다는 범어사를 관광하기로 했다.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의 3대사찰중 하나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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