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파하면 책보자기를 어깨에 질끈 매고 산 넘어 집으로 가던 길.
이런 봄날 산길엔 진달래가 붉게 피어 지천이었다.
굶주린 배를 채워보려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 나무그늘 아래서 한없이 따먹던 그 시절.
입술은 붉다못해 파랗게 변하곤 했다.
꼬불꼬불 산길은 굴곡지긴 했어도 길은 선명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장에 가실 때도 이 길을 이용하셨고 포장되지 않은 신작로가 있었지만 대부분 지름길을 택해 사람들은 산을 넘어야 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저 아래 강물 위를 지나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연초록 새순은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셨고 길섶에 숨어 피어난 들꽃은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거림이 좋았다.
그 강변 위엔 언젠가 물길을 막는 댐이 만들어졌고 그 위엔 육지 속 바다 충주호가 생겨났다.
외길이었던 충북선도 복선으로 바뀌면서 “칙칙폭폭”연기 뿜으며 달리던 철마도 이젠 전기기관차로 바뀌어졌다.
시멘트 화물차량은 기차답게 길게 연결되었지만 무궁화호로 명명된 여객열차는 4~5량의 꼬마 열차로 달리고 있다.
봄날 산속에는 봄나물 뜯는 어머니, 누나들이 있었다.
산도라지, 고사리, 곰취, 두릅, 원추리, 산더덕 등도 있었지만 이름 모를 봄나물도 많았다.
정말 신선한 자연 그대로의 나물이었지만 그 당시는 그런 싱그러운 맛을 몰랐다.
늘 동경하던 것은 고기반찬에 하얀 쌀밥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천이 들꽃이었지만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
붉은 장미 한 송이가 훨씬 값져 보이던 시절이었다.
노란 민들레, 크로바의 하얀 꽃무리, 개망초의 작은 꽃들, 달콤함에 뽑아 빨아먹던 띠풀…
엊그제 대전 KBS 방송총국에서 전시 중인 야생화 전시장을 다녀왔다.
매년 이맘때쯤 정기적으로 열린다.
휴일 늦은 오후. 예상보다 그리 붐비지 않아 좋았다.
모두들 들과 산으로 봄꽃 찾아 나간 모양이었다.
입구에 농업기술연구원에서 협찬, 전시한 몇 가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8년이나 되었다는 가지나무, 5년이 되었다는 방울토마토, 지금까지 나는 그저 1년생 단순채소로 알았는데 지금도 가지와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게다가 뿌리는 무이고 잎새는 배추인 무+배추가 싱싱하게 자라 전시되고 있었다.
무지개 색깔의 장미꽃.
형광빛을 발하는 장미꽃도 전시되고 있어 자연의 오묘함과 유전자 조작의 공포(?)도 함께 느껴졌다.
머지않아 땅속뿌리엔 고구마가, 땅위 덩굴엔 수박이나 참외가 열리는 시대도 머지않았으리라.
유전자 조작 옥수수가 미국에서 수입되었다고 떠들썩한 요즈음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대전 KBS방송총국 1층 넓은 홀엔 야생화로 가득했다.
“산너머 남촌에는” “이안숲속”에서 공동 출품한 작품들이다.
아! 이토록 정갈하고 깔끔하게 어떻게 키웠고 꽃을 피웠을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없는 조화에 길들어진 눈을 의심해 자꾸 손이 간다.
정말일까? 가짜일까? 하는 마음으로…
순순한 꽃 한송이라기보다 정말 작품이었다.
아무렇게나 피어낸 모습처럼 들녘의 꽃처럼 보이기에 더욱 정겨운 모습.
아! 아름다움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홀 전체를 들녘, 산자락으로 만들었다.
내가 그 사잇길을 걷고 있는 착각이다.
작은 바위틈에 심겨져 생명의 꽃을 피웠고 돌 틈엔 푸른 이끼가 몇 백 년 산속의 자태를 만들었다.
「고향마을」이라 명명된 작품.
그건 내 고향 모습이었다. 산과 들, 초가집이 있고 돌담길 사이에 굴곡진 좁은 길.
그 사이사이 이름모를 꽃들이 숲과 함께 생명을 발한다.
작은 물줄기는 내 어린시절 집 앞을 흐르던 개울과 어찌도 그리 흡사하던지…
꽃은 향기를 발하고 휘고 옹이 밴 나뭇가지는 분재의 고통을 안고 몇 백 년 수령의 정자나무로 축소되었다.
붓꽃, 라일락 향기, 철쭉, 금낭화 등…
늘 보았고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꽃들, 하지만 이름 생소한 꽃들이 더 지천이다.
저 꽃 이름은 누가 붙여주고 만들어주는가.
바위솔, 띠풀, 비비추 등 늘 보던 꽃들도 이렇게 예쁘게 피워 놓으니 정말 고귀해 보인다.
막사발에, 깨어진 항아리 조각 위에, 구들장 돌 위에 피워놓은 모습이 너무 정겹다.
목각 신발 안에 심겨진 바위솔, 녹슨 철모 총탄자국 사이로 싹을 틔워 성장한 옻나무.
예술품이 따로 없다.
자연 그대로 피어낸 모습이 예술아닐까?
들녘의 꽃이 아름답다. 정겹게 느껴진다.
작은 꽃 잔디 분홍색의 아름다움, 금낭화 꽃들의 어울림, 마치 작은 종들이 달린 듯 두드리면 소리가 들릴 듯하다.
돈 주면 금방 살 수 있는 장미나 백합, 안개꽃보다 작디작은 야생화 꽃잎에 정이 더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어린시절 들녘에서 뛰놀면서 늘 보던 꽃이기 때문일 게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남는 그 시절.
이른 아침 이슬 머금고 활짝 핀 나팔꽃.
누나들이 좋아하던 봉숭아꽃 저녁에 꽃잎을 여는 분꽃.
꽃잎도 풍성하게 장독이 뒤꼍에 피던 함박꽃.
산속에 노랗게 고개들고 피던 산나리.
햇볕 따라 고개 돌리는 해바라기
그 아래서 작디작은 모습으로 꽃 피우던 채송화 언덕길 따라 활짝 피던 구절초 꽃.
늘 보던 그런 꽃들이 이젠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파트 정원이라도 빌려 그런 꽃들을 심어보고 싶다.
꽃 속에 묻혀 살고 싶다.
그리움을 풀고 싶다.
아! 아름다운 야생화여.
어릴 적 꿈이 깃든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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