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묘지 앞에서

아버님 잘 계셨지요?
추우셨지요? 제가 왔습니다.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아직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아버님 묘소의 잔디도 벌써 누렇게 변해 버렸습니다.

묘소 뒷편 무성하던 나무들도 잎새를 떨어뜨리고 훌훌 옷을 벗어 버렸습니다.

묘소앞 과수원 사과나무도 이젠 다 수확해버리고 앙상한 가지에 아직 떨구지 못한 이파리만이 찬바람에 떨며 “윙--윙” 울고 있나 봅니다.

천국에도 4계절이 있나요?
그럼 그곳도 지금 겨울이 시작되었나요?
아니면,그저 평화로운 초록의 세계인가요?

아버님이 저의 곁을 떠나신지 오늘이 꼭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아기가 탄생하면 100일 잔치를 하고, 아들이 군에 입대하면 100일 휴가를 옵니다.

그리고 연인들은 만난지 100일이면 장미 100송이를 선물 한답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100일째 되는날, 나는 아버님 묘소를 꼭 찾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형제 자매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국화 한다발, 술 한병 들고 혼자 아버님 묘소를 찾았습니다.

술 한잔 따르고 엎드려 절 올립니다.

어린시절부터, 학교 다니던 시절. 군에 입대했을때, 학사모 쓰고 졸업 하던날, 회사에 첫 취직했을때, 내가 결혼하던날, 그리고 아버님 모시고 충주댐 근처 음식점에서 마지막으로 송어 비빔회를 사드리던 날,

수안보 온천에서 아버지 등 밀어드리던 날. 등등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날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갑니다.

아쉬움만 남습니다.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죄송함만이 느껴집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잘 모시라”는 글귀가 더욱 또렷이 기억됩니다.

효의 근본이 무엇인지 아버님 가시고 난후에야 마음속에 선명히 새겨집니다.

버스 지나간 후 손드는것과 다름없는 우매함이지요, 부끄럽습니다.

저도 딸을 출가시키고 아들을 군대 보내고 보니 부모님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것 같습니다, 조금이나마.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도 효(孝)랍니다.
죄 많은 중생이 지옥에 가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한자는 무거운 죄도
덜어준다는데 나는 어이해야 합니까?

살을 빌리고 뼈를 빌리고... 그것도 모자라 한 생애의 노고를 생각도 없이 받기만 한 은혜.
아버님 떠나신 빈자리에 눈물로만 남습니다 후회만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아버님을 뵙고 지난날을 회상해 보려 합니다.

아버님은 참 건강하셨습니다.
90세 되도록 이번 기회말고는 병원에 입원하신적도 몸에 칼을 대신적도 없었지요.
주사도 예방 주사외에는 맞으신적이 없는걸로 제가 기억합니다.
그건 우리들에게 큰 축복이자, 행복이었습니다.

60대 초반경 가끔 속이 불편하다고 하시면서‘노루모산’이라고 하는 소화제만 좀 드셨지요.

그토록 건강하셨는데 작년 9월부터 허리 통증을 호소하시기 시작하셨지요.

다리가 저리시다고도 하셨구요.
가까운 병원을 찾아 진찰을 했지만 대부분의 병원에서 고령이라 그렇다고 하면서 약만 좀 주고 물리치료만을 하셨습니다.

며칠 입원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잠시뿐 효과가 없었지요.
다시 좀 크고 이름 있는 척추전문 병원을 찾아 엑스레이와 MRI를 촬영한 결과 ‘척추관 협착증’이란 진단을 내렸습니다.

나이 듦에 따른 퇴행성 변화로 척추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좁아져
신경을 압박하게 되는 질환이랍니다.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늦게 알게 된것이지요.

수술외엔 특별한 진료방법이 없었지만 병원에서 아버님 연세때문에 수술을 꺼린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과에 의뢰, 수술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을 전문의가 내렸습니다.
연로하셨기 때문에 마취에서 깨어 나실지,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이겨 내실지는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수술은 진행 되었습니다.
수술결과는 좋았습니다.
곧 회복 되실거라는 의사 말대로 빠른 회복과 통증도 많이 사라지셨습니다.

병실 복도를 오가시며 재활 치료를 받으시는 모습과 웃음짓는 아버님 모습이 그 무엇보다도 제겐 행복이었고 보람이었습니다.

수술 2개월후 일단 퇴원을 하셨지요.
그렇게 좋아질 줄 알았던 아버님 건강에, 다시 6개월 후 어둠의 그림자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술 결과 및 의료 데이터를 가지고 대전 충남대, 서울 경희대 한방병원을 오갔지만 모두들 고령탓에 손댈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시면서 편히 모실것을 권유했습니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차마 아버님껜 말씀 드릴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불편해 하셨지만 어쩔수 없는 결과이기에 다시 충주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가끔 제차에 모시고 수안보로, 충주댐으로, 월악산으로, 제천으로 드라이브겸 나들이를 했습니다.

통증이 올때면 의사에게 비보험대상 이지만 통증 완화제를 놓아 드리라고 별도로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아버님도 예측을 하셨는지, 영감을 받으셨는지, 제게 예금등 모든것을 말씀해 주셨고 어머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의사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충주를 밤에 가기를 4번, 하지만 그때마다 고비를 넘기시더니 마지막날 온화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렇게 아버님과 우리가족은 이별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걱정하시면서 부탁하신 어머님도 아버님 뒤를 따라 40일후 같은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불초한 자식들이 잘 모시지 못함 때문이지요.
하늘나라에서 만나셨지요?
즐겁게 영혼의 삶을 누리고 계시지요?

지금 어머님도 옆에 누워 계시잖아요.
봉분 2개가 나란히 놓여졌습니다.
내년 봄 꽃피고, 새가 울때 쯤 더욱 예쁘게 잔디도 보완하고, 꽃나무도 심겠습니다.

형제 자매 손자들 이름까지 뒷면에 넣어서 비석도 세우고, 젯상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들녁은 이제 빈들이 되었습니다.
알갱이 털린 껍대기만이 누워 있습니다.

볏집이 그렇고, 참깨가 그렇고, 옥수수 대궁이 그렇습니다.
고추 대궁은 그자리에서 말라 버렸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다시 대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주 들리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생각이 날때 그저 찾아오겠습니다.

이렇게 라도 와서 뵈어야 제 불효가 조금은 가벼워질 것 같아서 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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