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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고향길/ DY엔지니어링 대표 수필가 최한용

고향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가슴속에 무언가 가두어 두고 싶은 그런곳.
언제나 마음이 평온하게 느껴지고 가고픈 곳, 고향
웬지 모르게 정감이 가고,웬지 모르게 어릴적 운치가 살아나고,
웬지 모르게 가슴 뭉클 하거든요.
저만 그런가요?
마음만 먹으면, 아니 약간의 비용과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갈 수 있는 곳인데도 늘 그립다.
그래도 갈수있는 고향이 있다는건 큰 행복이다.
고향이 그립지만 갈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실향민이다.

임진각 제단에서 북녘을 향해 아쉬움만 남겨두고 되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고향은 어떻게 느껴지고 보여 질까?
지구 반대편 까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세상인데도 지척의 북녘땅은 마음대로 넘나들수 없는 장막이 되어 버렸다.
철새만이 오갈 수 있는 길이 되였다.

설이다.
고향길을 간다, 날씨도 춥고 눈도 많이 내려 길도 미끄럽다.
하지만 그리움 하나 안고 그 어려운 길을 간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안전하게 도착 하는게 최우선이니까.
눈길, 온 세상이 하얗다.
참 많이도 내렸다,쌓인 눈이 20센티 이상 되는 듯 하다.
가는 길에도 눈발이 날린다.
주 도로는 오 가는 차량 때문에 길이 뚫렸지만 시골길은 눈위를 달린다.길도, 산도, 논 밭도 온통 눈세상이다.

나무 가지위에 내린 눈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가는 길이 미끄러워 운전 하기에 온 신경이 쓰이지만 정말 정겨운 풍경이다.
이 하얀 눈을 얼마만에 보는 모습인가.

아름다운 풍경인가,그것도 고향하늘 아래에서-----.
어릴적 눈 사람 만들던 기억이 살포시 살아난다.
장갑도 없어 손을 호호 불며 만들던 눈 사람.

하지만 금년 고향길은 예년과 다르다.
밝은 모습으로 기다려 주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가는 길도, 주변나무도 변한것은 없건만, 내 마음 한구석은 텅 비어있다.
늘 전화를 드리고 도착 예정시간을 알려드렸는데도 아버님, 어머님은 집밖에서 이제나, 저제나, 도착할까 하면서 동구밖을 응시하고 계셨다.

바람도 찬데...
이제 우리가족은 충주에 도착해서 바로 형님댁으로 가야한다.
들려야 할 부모님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벌써 아버님이 세상 뜨신지 6개월이 되어간다.

어머님은 그 날짜에서 40일을 빼어 버리면 된다.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그토록 빠르게 흘렀고 부모님 돌아 가신후 처음 맞는 설날이 되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설레임이 반감되고 이젠 그저 차례 지내고 성묘한다는 의무감이 앞서는 듯한 기분이다.

작년 설때는 부모님 댁에 먼저 도착해서 모시고 수안보 온천을 다녀왔다.
아니 그건 늘 하나의 예정된 수순이였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언제나 아버님 등을  밀어 드렸다.
아버님의 가냘픈 몸에서 늘 죄송스런 마음이 걸렸었다.

90년이라는 인생 삶을 오직 8남매을 위해 희생하신 흔적이 남아 있는듯 보여 졌기 때문이었다.
옛 농촌은 살기가 어려웠다 정말 가난했었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어린 우리들 교육과 성장을 위해 묵묵히 농사일을 하셨다.

의무감이라고 단정 하기는 너무 큰 삶의 무게가 되였으시리라.
지금은,  둘 키우기도 버겁다고 난리 들이다.
교육비 부담에 힘들고, 수능시험 뒷바라지에 부모들까지 잠못 이룬다고...

시대에 따라 어려움도 다르겠지만 그 시절 그 힘든 상황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느낄수 없다.
지금 처럼 농로가 잘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농기계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것은 오로지 몸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산자락 다랭이  논까지 모든것은 A자형 지게로 나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무거운 하중은 온 몸을 누르고 등뼈를 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여파로 아버님은 노년에 허리 통증을 호소하셨는지도 모른다.
결국 허리통증을 시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고 누르는 척추 협착은 허리신경을 조여 걸음 걸이 마져 힘들게 하셨고, 결국 그 허리 통증으로 유발된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하지만 아버님은 참으로 건강한 삶을 사신게 그나마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90평생 병원에 한번 입원하신적이 없었고 몸에 칼을 한번 대신 적이 없었다.
허리통증으로 입원하셔서 6개월정도 병원 생활을 하시다가 부모님을 모두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한해가 되었다.
이제 그런 한해를 보내고 다시 새로운 2009년 설을 맞아 고향에 간다.

그래도 고향은 그립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고향 마을을 떠나 조금은 외롭고 쓸쓸해진 모습이지만 내 어린시절 자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그립고 반갑다.
지금 형님이 생활하고 계신 집은 내가 태어난 집이다.
초가지붕이 기와집으로, 장작때던 아궁이가 기름보일러로 바뀌는등 내부구조는 확 바뀌었지만 그 번지, 그 땅위에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별채의 화장실, 소 외양간, 담배 건조실은 없어졌지만, 산자락 아래 남향집 그대로다 아직도 뒷편엔 쓰지않는 우물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고 장독대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동생이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묘종을 얻어다.

심은 작은 은행나무는 큰 나무로 자라 가을이면 많은 은행을 열매로 수확하고 있다.
우리가 어릴적 “와룡기”라 부르던 탈곡기도 처마 밑 한곳에 삶의 이력을 간직한채 녹슨 상태로 놓여있다.

농사 박물관에라도 기증해야하는 물건은 아닐런지...
그리고 어릴적 앞산엔 참나무가 빼곡 했었는데 과실수를 심어야 한다는 정부 정책으로 참나무는 베어지고 그자리에  밤나무가 심어져 이젠 고목이 되었다.
덕분에 늦가을 추석무렵엔 심심찮게 산에 올라 밤을 주워오고 있다.

부모님이 심어 놓은 과실수를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얻어먹고 있는것이다.
수확을 따 먹고만 있다.
참 많이도 주변은 변했다.
근 100여호 가깝던 마을엔 지금은 30여호도 남지 않았다.
마을이 텅 비었다 빈집이 여기저기 무너져내려 때론 츙칙스런 모습도 남아 있다.

사시는 사람들도 많이 바뀌어 내가 모르시는 분이 더 많다.
일부 도로변엔 중소 공장도 들어왔다.
덜컥이던 황토길은 모두 아스콘으로 포장된 신작로로 바뀌어 졌고 우마차 다니던 그 길위엔 자가용이 오르내린다.
겨울이면  지게꾼들의 나무짐이 줄을 이루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주 가끔 가스 배달 차나 난방유를 실은 트럭만이 오갈 뿐이다.

담벼락 양지쪽에 예쁘게 쌓였던 장작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엔 꽃들이 심겨졌다.
마을의 집들도 환경이 확 바뀌어 버렸다.
도심의 주택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집에서 되도록  멀어야 한다는 화장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갔고, 소를 기르긴 하지만 아침, 저녁 소죽 쑤던 가마솥은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물과 사료, 그리고 볏집으로 그 소죽을 대신한다.
그리고 아침 저녁 솟아 오르던 굴뚝의 연기는 이제 보기 어렵다.

전기밥솥이 그를 대신하고 가스레인지가 그 업무를 인계받았다 구수한 보리차나 숭늉보다 커피가 음료로 대치된지 오래다.
짧은 거리를 오가던 자전거 대신 화물용 트럭과 자가용이 넓은 마담에 서있다.

정겹던 방물장수나 이동용 트럭 만물 장사도 사라졌다.
횡 ----하니 시내 대형 할인 마트를 다녀오기 때문이다.
이젠 농사 지으면서 사이밥이나 점심준비를 위해 한 사람이 남아 식사준비를 하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 핸드폰으로 주문을 하면 일하는 곳까지 배달 해준다.그게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고향은 늘 그립다, 정겹다.아름답게만 보인다.
시골 옛길을 걸으면서 어린시절 모습을 떠 올린다.

그길 그대로, 그 옛날 생각으로 걸어본다.
내게 고향은 그런곳이다.웬지 모르게 마음이 평화롭다.
자주 오고 싶다. 오는 길에 부모님 산소도 들려 인사도 드리고-----
그리움의 고향길, 나는 그길을 지금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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