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최한용과 茶한잔의 여유를…
어머님 첫 기일(忌日)을 맞으며,최한용/DY 엔지니어링 대표 / 수필가

 

   
 

 

어머니! 다시 한번 불러봅니다. 하지만 대답이 없으십니다. 어머님이 저의 곁을 떠나신지 벌써 일년이 되었습니다. 참 세월은 빠릅니다. 어머님의 위급상황을 연락받고 달려가 임종을 지켜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벌써 1년이라는 한바퀴 궤적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1년전 오늘 밤 10시. 그때도 저녁에는 선선했습니다. 대전에서 급히 연락을 받고 우선 혼자 병원으로 달렸습니다. 주위의 밤공기, 어두움, 차량 지체,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일념밖에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도로에 비추어지는 라이트빛을 따라 차는 달리고 달렸습니다. 담당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는 어쩌면 잘못될 수 있다는 전제였기에 더욱 마음만 조급했었지요.

갑작스런 어머님의 병세 악화. 제가 동생을 보내 오늘 오전에 MRI를 찍으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런 예측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병세가 있어 병원에 입원 중이셨지만 제가 뵙고 온게 3일전. 그날은 저를 똑똑히 알아보셨습니다.

대전서 바쁜데 무엇하러 왔냐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담당의사도 뇌신경 조직 검사를 위해 MRI 촬영을 해야겠다고 해서 제가 용인을 했고 대금을 입금시켰지요. 오전 중 검사를 잘 마쳤다고 동생은 입회후 돌아왔는데…. 그로부터 열시간도 채 안되어 어머님은 끝내 이승과의 작별을 하셨습니다.

임종.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간단했습니다. 담당 의사의 한마디 결정에 어머니와 저는 말 한마디 나눔도 없이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영원히 헤어져야 했습니다. 잠시 너무 허황된 결과에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습니다. 같이 계셨던 형님과도 서로 주고 받을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상황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우선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장례장에 수속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머님 뒤를 따라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자리를 옮겼야 했습니다.

초가을 밤하늘. 까만 창공엔 유독 오늘밤 유난히 빛나는 별이 하나 있었습니다. 먼저 가신 아버님 별이 아닌가 하고 느꼈습니다. 아버님이 홀로 계셔서 외롭게 보여지는 별. 그 별옆에 어머님 별로 새로 뜨리라 마음먹으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아버님이 세상을 뜨신지 꼭 40일 만에 어머님도 따라 가셨기에 곁으로 가셨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지요.

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충주에 가기만 하면 산소에 들러서 인사드리고, 무언의 대화라도 나누어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일부러도 여러번 갔었지요. 지난 어버이날은 카네이션 화분을 갖고 가서 묘소앞에 심었더니 얼마전 벌초하는 날, 그 생명이 붙어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내년 봄, 다시 스스로 꽃을 피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어머니 사랑에 대한 예찬은 한이 없지요. 어머니 사랑은 무한합니다. 어머니 사랑은 동그라미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는 어느 외국인 작가의 책 제목도 생각납니다. 생명을 준 고마움에 대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자신을 희생해 가시며 키워준 자식들에 대한 무한의 사랑. 어머니 사랑은 오로지 희생뿐이셨습니다. 대가를 원하지 않는 사랑뿐입니다.

요즈음은 생활 여건이 많이 좋아졌지요. 어머님이 우리 자식들을 낳고 키우실 때는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습니다. 우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절박한 시절이었습니다. 5남 3녀, 8남매였습니다. 먹여야 했고, 입혀야 했고, 학교 보내야 했습니다.

시골 농촌의 삶. 60~70년대 대한민국 농촌은 정말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가난의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밤을 낮 삼아 어머님, 아버님은 농삿일을 하셔야 했고, 우리들은 그런 고충도 이해하지 못하고 칭얼거리기만 했습니다.

늘 불평 뿐이었지요. 가난에 대한 저항뿐이었지요. 야채, 고추. 파, 고구마, 감자… 등 돈이 될만한 것은 밤새 모두 준비하여 장날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시고, 장터로 가셨습니다. 돈이 아까워 제대로 점심도 사드시지 못하고 그냥 오셔서 꽁보리밥에 고추장 하나로 늦은 점심을 드시곤 하셨지요.

그런 상황을 저희도 결혼 후 자식을 낳고부터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게 철이 든 것이지요. 이제 5남 3녀, 다 결혼시키고 손자, 손녀들 재롱과 함께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셔야 하셨는데… 세월은 그 영광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시게 만들었습니다.

얼마전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했습니다. 1년이지만 잔디는 푸르게 묘소를 덮어 제자리를 잡았더라구요. 모든 아들, 딸, 손자들이 참석해서 벌초를 했답니다. 어머님, 아버님에 대한 옛 그리움이 늘 머릿속에 남아 있었지요. 형님의 아들 동철이도 결혼 후 튼튼한 아들을 낳았고, 저의 딸 은영이도 아들을 순산했습니다.

 모두 증손자이지요. 살아계실 때 안겨드렸으면 4대가 모이는 행복스런 가족 모습이 되었을텐데 어찌 보시지 못하고 두분이 함께 가셨는지….

아버님 어머님 돌아가시고 나서야 늘 부족했던 효(孝)를 생각해 봅니다. 살아계실 때 잘했어야 하는데…, 살아계셨을 때 자주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전화라도 자주 드렸어야 하는데…. 타지에서 생활이 바쁘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늘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식이었지요. 풍경 좋은 곳에 모시고 다니면서 관광도 시켜드리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렸어야 하는데 늘 말뿐이었나 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자식들의 행복스런 삶을 위해 늘 묵묵히 기도만 하셨지요.
그래서인지 저희는 크면서 아버님 어머님이 큰소리 내시며 싸우시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부부 금실이 좋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먼저 가시고나서 곧바로 모셔가신 것 같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버님 만나셔서 또 다른 즐거운 영적생활을 하고 계시지요? 이승에서 못다이룬 남은 정(情)을 뜸뿍 받으시며 지내고 계시지요? 하늘나라엔 아픔이란 단어는 없지요? 자식 낳고 제대로 산후 조리도 못하셔서 늘 허리도 아프시고 머리도 아프시다고 하셨는데… 그게 지금도 걱정됩니다.

오늘 우리 5남 3녀가 다 모였습니다. 어머님 첫 기일, 제삿상 준비하고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립니다. 지금 저희들이 보이시지요?  많이 드시고 가셨으면 합니다. 어머님 좋아하시던 떡도 과일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증손자 모습도 보고 가십시오. 용감하고 씩씩하게 생겼지요. 우리집 가계를 이끌고 갈 기둥이랍니다.

아버님, 어머님.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남은 저희들, 열심히, 재미있게, 형제자매 우애좋게, 보람있게 살아가겠습니다. 다시한번 마지막 절을 올립니다.
                 
                                                             불효 자식   한  용  올림

금산신문  webmaster@igsnews.co.kr

<저작권자 © 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금산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