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웅기(1931-2005) /수필가
음악회장이라는 곳을 다소 켕기는 기분으로 동행의 K씨와 들어섰다. 음악을 듣기보다 호화로운 콘서트를 구경하러 온 셈인데 마치도 애인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듯이 설레는 것이었다.
잘 차려입은 남녀들, 눈부신 조명 불빛, 궁정같은 실내장식에 압도되어 콘서트홀로 들어서기도 전에 걸음걸이가 멈칫거려졌다. 그러나 막상 푹신한 의자에 자리를 정하고 서둘러 주위를 보니 왠지 가벼운 실망감이 느껴졌다. 연주회라면 19세기 소설 속의 마차를 타고 온 성장(盛裝)한 귀족남녀는 아니라도 그래도 검정색 예복에 넥타이를 맨 정장의 신사들과 가슴이 푹 패인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이 장내를 메울 줄 알았는데 어쩐지 그렇게 화려하지는 못한 분위기였다.
시장에나 나온 김에 잠깐 들렀는가 싶게 수수한 평상복 차림의 여인들이 많았고 약간의 데이트족 말고는 남녀 쌍쌍의 즐거운 사교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저쪽에는 책가방을 든 학생들이 좌석을 찾으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래서야 어디 춘희(椿姬)의 연애나 몬테크리스트 백작의 복수가 진행된단 말인가. 이 여인들의 남자들은 모두 대폿집이나 고급 요정의 아가씨들과 맥주를 마시러 간 것일까? 나 역시 홀아비 구경꾼이지만 갑자기 홀어미 음악감상가들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음악회 입장을 감행한 일이 대단히 기사도적인 행위로 느껴졌다. 그때 내 옆 빈 자리에 한 여인이 역시 혼자 걸어오더니 다소곳이 앉는 것이었다. 슬쩍 옆눈으로 보니 조용한 표정의 옆얼굴을 하고 단정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전에 학교에 다닐 때 기숙사생 일동이 서커스를 구경하러 간 일이 있었다. 모처럼의 구경에 우리는 매우 즐거웠다. 더구나 저쪽 뒤에서 선생님과 함께 걸어오는 여자기숙사 학생들의 모습에 가슴이 자꾸 들썽거려 울렁였다. 딴따라의 나팔소리가 애절하게 후비면서 파고들고, 먼빛으로 얼굴이 흰 한 여학생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그 여학생이 옆에서 함께 구경하였으면 하고 매우 아쉬워했다.
콘서트가 시작되고 시끄럽게 들리는 소리 속에서도 어쩌다 아름다운 선율이 가슴을 출렁거리게 하면 불현듯 옆의 여인이 그때의 그 여학생이려니 하는 느낌이 들어 몰래 여자의 얼굴을 훔쳐보곤 했다. 사실 아무리 화음이 호화로운들 홀아비나 홀어미로 음악을 듣는 시간은 얼마나 싱거우냐.
밝은 집중라이트를 받으며 바이올리니스트가 가슴을 에는 비통한 선율을 자아내면, 그것이 어느 사이에 옆의 여인을 향한 애절한 호소처럼 생각되어 감정이 벅차오르고 이 여인의 음악에 대한 가득한 감동이 나의 말에 대한 감격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오늘밤의 음악에 넘치는 감흥을 붙여준 이 여인에게 감사해야 할까. 진짜 애인을 음악회에 데리고 와서 하고 싶은 그 애절한 노래를 연주되는 음악소리를 빌어서 해도 좋으리라. 마치 연주자가 작곡가의 작품으로 자기의 감정을 나타내듯이.
세상의 여인들이여! 연주회에 갈 때만은 잘 차려입고 남성들을 동반해서 가라. 그러면 그대의 인연은 더욱 감격적인 사랑으로 깊어지리라. 선율의 진홍은 그만두고라도.
세상에 여자가 없었다면 남자들은 예술을 창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에 대한 절실한 감정이 가득 채워질 때 남자들은 아름다운 호소를 곡에 붙여 내놓는다. 그것은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지만 음악회에서 연주되면 모든 남성이 저마다의 여성에게 보내는 사랑의 호소가 된다. 그래서 음악회에 와서 듣는 음악이란 남자와 여자가 그네들의 아이를 낳기 전에 낳는 아이라고나 할까.
콘서트가 끝나고 청중들이 몰려나오는데 여자, 여자, 여자들이고 가끔 남자였다.
“여성이 아니었다면 음악회는 없다, 없어”하고 옆의 K씨가 말했다. 그것은 책도 그렇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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