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최한용과 茶한잔의 여유를…
아버지, 우리 아버지

아버님 기일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2년전 이 더운 여름날 돌아가셨다. 벌써 기일이 한번 지나갔고 두번째 기일을 맞는다. 내 어릴적에는 소상, 대상이라고 해서 돌아가신지 2년까지는 요즈음 장례일 못지않게 상주들은 곡도하고 조문을 위해 동네 사람들은 물론 외지인까지 손님들이 많았다.

지금이야 장례식 치르고 49제때 대부분 탈상을 하지만 소상, 대상을 치르고 3년이 되어야 탈상을 했다.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늘 건강 하셨는데 나이 90을 막 넘기시자 허리통증을 하소연 하셨다.

요추 협착에의한 신경눌림으로 통증은 물론 걷기가 어려워지셨다. 수술이외엔 방법이 없단다. 하지만 연세가 고령이어서 외과적 수술이 어렵다는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이였다.

충주, 대전, 서울로 큰 병원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의견은 모두 같았다.

고령이시라 수술후 마취에서 깨어 나시지 못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충주의 한 척추전문 병원 담당원장은 내과 전문의의 마취에 대한 체질검사 의견을 접수 받은후 수술을 집도 해 보시겠다고 했다. 나는 원장님에게 요청을 했다, 몇년을 더사시는 것 보다 짧은 삶을 사시더라도 사시는 날까지 통증만 없게 해 달라고 했다. 어려운 수술은 집도 되고 6시간 넘는 장시간 수술끝에 잘 마무리되였다.

마취에서도 바로 회복하셨고 좀 지나자 통증도 사라지셨다고 했다.괜히 수술을 진작 했을건데 이곳,저곳 오가며 고생만 하셨다는 아버님 말씀,얼굴도 좋아지셨고 병원에 입원은 하셨지만 즐거워 하셨다. 하지만 수술전에 원장님으로부터 나는 들은 말이 있어 내심 불안했다.

완벽한 치료가 아니라는 것이였다. 우선 통증을 해소함이 목적이였고 신경부위가 좁아져 1년정도 밖에 더 사실수 없다는 말씀이셨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아버님께 차마 드릴수가 없었다.

형제자매등 가족과 협의하에 결정한 사항이였지만 통증을 해소 하기 위함외에는 방법이 없었고 그게 최선의 방법이였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선 후회한적이 없다.

어차피 영생 하실 수 없는게 사람의 삶이니까. 그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잘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였다고 자부한다.

그후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한후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아버님도 원하셨고 가족들도 동의했다. 짧은 기간이였지만 거의 매주 대전에서 충주를 다녀왔다.가서 뵙고와야 마음이 더 편했다.

그 동안 아버님을 모시고 충주근교를 많이도 다녔다. 우선 수안보 온천탕에 가서 목욕을 시켜드리고 충주댐, 월악산 송계계곡, 대원사 절,코타레져 타운,중앙탑공원, 탄금대~~~등을 드라이브 시켜드리면서 좋아하시는 송어 야채비빔회,순대국, 영양탕등으로 점심을 사드리곤했다.

평소에 그런 말씀을 잘 안하셨는데 아버님은 어느날 부터 자식인 나에게 늘 “고맙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식인 내가 당연히 해야 할 몫인데 그 “고맙다”는 말씀을 듣자 이상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로부터 병세는 악화되고 통증은 점차 심해지면서 외출을 하시지 못했다.

요양병원 담당의사는 이제 대안이 없다고 했고 통증해소를 위해 몰핀이 투여되기 시작하면서 그 주기는 점차 단축되고 있었다.그 와중에도 아버님은 홀로 남아 계실 어머님 걱정이셨다.

그로부터 몇 주후 중환자실로 옮겨지시고 의식마져 오락가락 하셨다. 그렇게 아버님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시고 생을 마감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참 금슬이 좋으셨다. 8남매(5남3녀)를 낳아 키우시면서도 어려운 농촌 살림이지만 싸우시는 모습을 우리 자식들은 본적이 없다.힘들고 어렵지만 슬기롭게 대처하시면서 충분 하지는 못했지만 모두들 교육도 시켜주셨다. 6,70년대 농촌의 삶은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끼니걱정 하지않은 것만도 다행이였다.우리는 끼니를 굶은 적은 없었다. 대신 저녁을 죽으로 먹거나 점심은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로 대신 한적은 많이 있었지만~~.대신 농사일은 많이도 했다.일손이 모자라니 안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방학기간, 달력에 빨간날은 농부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수학여행이나 공부가 아닌 무슨 행사일 같은 날은 학교를 가지못했다.

겨울방학은 농한기였지만 땔감 확보를위해 나무꾼이 되어야 했다.그래서 나는 안해 본 농사일이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단련된 실전의 노동일이 성장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있다.

모두들 힘들었다는 군 생활도 그리힘든지 몰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도 그때 몸에 밴 습관이였다.지금도 농담 삼아 하는 얘기가 있다.

내 키가 작은 것은 어릴때 지게질을 너무 많이 한 탓이라고~~~~. 무거운 지게가 어깨를 짓누르니 키가 클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내 자식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지않겠다고 늘 다짐했는데--,너무 과잉보호 하는것은 아닌지?

지난 4월말 아버님 산소를 찾은 이후 아직 찾아뵙지 못했다.

잔듸는 잘 자라고 있는지? 잡초만 무성한것은 아닌지? 조화이지만 꽃을 꽂아드렸는데 색갈이 퇴색 하지는 않았는지? 불효자식은 그저 앉아서 걱정만 한다.

제사날 형님댁에 가면서 둘러 보아야겠다. 벌초는 아직 이르니 추석전에 온 가족이 모여 하면 될것이고--.

한 여름밤, 어둠속에서도 하늘이 맑다.

도심이라 별은 보이지 않지만 저 하늘 어딘가에 내 부모님 별은 있으리라

어릴적 외 할머니께서는 내게 옛날 얘기 해주시면서 사람이 죽으면 별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셨다.

어딘가에서 반짝이시면서 우리 형제들의 삶을 내려다 보고 계시리라

요즈음도 아버님을 가끔 꿈속에서 뵙는다. 변함이 없으시다. 한동안 말씀을 나누시다 번쩍 눈을 뜨면 아~~~~그건 꿈이였다.허황된 내용이지만 아버님 모습은 늘 맑으셨다.그렇게 아버님을 뵙는다.

꿈속이나마 자주 뵙고 싶다. 사후 세계는 어떨지 모르지만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으리란 확신이간다.

지금도 어려운 일이있거나 결정하기 힘든일이 생기면 아버님, 어머님께 “지혜를 주십시요”하고 아침마다 기도드린다. 살아 생전 더 편히 모시지 못하고, 더 많이 찾아뵙지 못하고, 때 지난후 늘 후회하는게 부모님에 대한 자식들의 공통점인가 보다. 효도하려 하니 부모님 계시지않는다는 옛 말. 하나도 틀리지않는가 보다.

아버님, 어머님, 불효자식 이제야 후회합니다. 용서 하여 주시옵고 아픔없고 병마없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영생 하시옵소서. 아버님 기일을 맞아 몇자 불효의 변을 적었답니다.

금산신문  webmaster@igsnews.co.kr

<저작권자 © 금산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