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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가 슬프게 들리는 이유.

구제역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떠들석하다.구제역은 멈출 줄모르고 확산되어간다. 재난이라기보다 재앙에 가깝다.벌써 살천분된 소와 돼지,염소가 이백만마리를 넘었고 피해액도 방역비를 포함 2조원에 이른단다.
도로 곳곳에서  방역을 위한 소독액이 뿌려지곤 있지만 겹친 한파로 소독액마져 얼어버렸다, 방역에 동원된  공무원들의 애로도 말이 아니다. 청정국가를 포기하고 예방접종도 시작했건만 좀처럼 구제역 확산은 아직 잠들지 않고있다. 어찌해야 할까? 정확한 답과 대책이 없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확산되지 않도록 방역과 살처분에 관련된 공무원, 수의사,축산업 관련자들이 필살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만 아직 상태는  확산되고 있어 더욱 문제다.뉴스 듣기가 겁날 뿐이다.

특이하게 발굽이 두개로 쪼개진 동물에만 걸린다는 구제역.
그나마 다행인것은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고 끓이거나 삶으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어릴적 생활를 대부분 시골에서 보냈다. 그 당시는 대부분 농사가 주업이였다. 지금처럼 기계화 영농은 꿈조차 꿀수없었고 모든 일은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해야했다. 그래서 소의 중요성은 대단했다. 그 당시 소는 지금처럼 대규모의 축산업이 아닌 농사를 짓기위한 수단으로 대부분 집집마다 한마리씩 길렀다,   논과 밭갈이엔 소가 필연이였다.반듯이 있어야했다. 쟁기로 논과 밭을 갈고 운반수단으로 우마차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는 농가의 재산목록 1호이자  가족의 구성원이나 다름없었다. 어르신들은 소를 끔찍히도 아끼셨다. 병들지말고 새끼도 잘 낳으라고  늘 관심과 배려로 정성껏 보살펴 주셨다.

그 당시는 한마리를 키우는 집이 대부분 이였기에 지금처럼 곡물 사료를 먹이는 집은 거의 없었고 풀과 짚, 버려지는 잔밥음식, 쌀겨,쌀등 곡물을 씻을때 생기는 구정물로 (충청도에서는 뜬물이라 불렀다.)  쇠죽을 끓여주었다. 따라서 시골에서는  지금처럼 버려지는 음식이 없었다.

요즈음 농촌처럼 트랙터,콘바인등은 탄생되지도 않았기에 소는 농사짓는데 반드시 있어야했다. 여름철이면 농사일이 바빠 우리같은 어린이들은 소꼴을 베어 오거나.소를 끌고 나가 수풀 무성한 긴 방죽을 따라가며  풀을 뜯어 먹도록 하여야 했다. 잠깐 생각에 소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소줄만 잡고 있으면 될 것 같지만  특히 황소(숫소)는 어린이들을 깔 보기라도 하듯 이리뛰고 저리 뛰기도 해 그것도 힘든 노동이였다.

농촌에서 소는  논과 밭의 쟁기질 하는데 반듯이 필요도 했지만  외양간에 깔아주는 풀과 보리짚은 배설물과 어울어져 농사에 필요한 퇴비도 만들었다. 우마차는 운반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해 소도 쉴날이 별로 없었다.
또 당시는 소를 하루 빌려주면 그 댓가로 건장한 일꾼이 하루 8시간의 노동을 대신 해주어야 했다, 소는 농촌의 부를 일으키는데도 일조했다.소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송아지를 받아 1년 키워주면 새 송아지 한마리를  받을 수 있었다. 

대개가 농촌에서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려면 소를 팔았다.그래서 소 팔아 대학 공부시켰더니 취직도 못하고 저 모양 저 꼴이라고 취직못하고 빈둥거리면 욕 아닌 욕도 많이 들어야했다.

요즈음은 어떤가?  소대신 경운기나 트랙터, 콘바인이 그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기계화 영농이 된것이다.물론 옛날처럼  농사를 짓는다면 우선 지을 사람이 없다. 지금 젊은이들은 모두 도심의 산업화 역군으로 빠져 나가고 농촌엔 나이드신 분들 뿐이다. 이젠 힘만 가지곤 농사일를 할 수가 없다.사람도 없지만 수익을 맞출 방법도 없다. 쌀 소비는 줄고 다른 물가에 비하면 쌀값은 무척 싼편이다. 우리가 클때만 해도 모든 물가의 기준은 쌀을 표준으로 삼았다. 작은 모임에서의 경조사비 지출도 쌀을 기준으로 삼았었다.

소는 눈망울이 크다, 그래서 더욱 순해보인다.아니 착하게 느껴졌다. 우리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았던 소,아니 가족의 일원처럼 아끼고  보살피며 챙겨주셨다.겨울이면 추위를 이겨야 한다고 소등에다 덮석이라는 명칭으로 짚으로 만들어 저녁이면 늘 이불처럼 씌워 주셨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큰 가마솥에 한가득 소죽을 쑤어 먹였다. 물론 방에 군불을 때기 위함도 있었지만 소를 먹이기 위함이 우선이였다. 그리고 한 여름이면 산과 들에 매여놓아 풀을 뜯어 먹도록 했고 한낮에는 목이 마르다고 늘 집으로 몰고와 물을 먹이곤 했다.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극진히 사랑했다.

지금은 비육우나 우유를 얻기위한 수단으로 대량 사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농사는 기계가 대신하고 이젠 대형화된 축산업으로 변했다.그러다보니 구제역이 한마리라도 감염되면 주변의 농가까지 모두 살처분 할 수 밖에 없다. 죽어가는 소도 불쌍하지만 가족처럼 키우던 소를 살처분 해야하는 농장주나 공무원,수의사들도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나보다.

최한용  webmaster@ig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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