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나서 인민군 장교는 “이 집 모두 불 질러버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이사장의 어머니가 인민군 장교를 세게 밀쳐버리면서 “왜 이러느냐? 위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면 될 것이지, 집에 불은 왜 질러?”라며 울며 대 들었다.
어머니의 거친 항의에 멈칫하던 인민군은 은종이를 들어 위로 올려 보냈다.
그때 지붕 아래는 죽음의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이고 있던 두 남자의 눈빛. 죽음과 바로 직면해 있는 그 사람의 심장 박동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었다. 두 남자는 은종이에게 손가락으로 ‘쉬잇~’하는 동작을 보였다.
겁에 질린 은종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민군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다행히 인민군은 더 이상 확인을 하지 않고 한 명을 연행 해 돌아갔다.
다시 어머니가 인민군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저 아이를 내려주지 않으면 누가 내려주느냐”며 소리를 쳤다. 그러자 인민군은 두 팔을 뻗어 은종이를 높은 곳에서 내려주었다.
인민군이 떠난 간 얼마 후 탕탕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그들은 국군 유격대를 숨겨주었다는 죄로 수배를 받고 있는 소위 반동분자 들이었다.
설날 아침에 벌어진 끔직한 일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소년 은종이는 마을에서 영웅이 되었다.
은종이가 사는 마을은 수시로 국군유격대가 나타났다. 몇몇 마을 주민은 국군을 도왔다. 그러던 어느날 유격대의 도움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그런 와중에 은종이가 바다에 빠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영을 하지 못하는 은종이가 가라앉지 않고 물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짚신 여러 켤레가 양쪽 어깨로 가로질러 묶여 있어서 그게 부력작용을 했던 것이었다.
가족들은 백령도 옆 초도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휴전이 될 무렵, 국군의 해군 LST를 타고 인천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인천은 피난민이 넘쳐나 받아주질 않았다.
다시 군산항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입항을 거부당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이 목포항이었다.
목포항에서 내린 가족들은 다시 배를 타고 진도항에서 내렸다. 진도사람들은 동포애를 발휘했다. 달구지와 리어카를 가지고 선착장까지 나와 노약자와 아낙네들을 태우고 난민수용소로 옮겨주었다.
진도군 의신면 왕무덤재에 난민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고향 황해도에 비하면 너무나 따뜻한 곳이었다. 남도의 해풍은 춥지도 않았다. 바닷가 언덕자락에 핀 노란 개나리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피난민들을 위로 해주었다.
어느 날 군대항 체육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은종이가 씨름선수로 참가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거친 배급 밥을 먹고도 우승을 한 것이다. 그러자 피난민들은 은종이가 원주민을 이겼다며 대단히 좋아했고 축제분위기였다.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샅바를 잡고 구르고 했던 저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부상으로 공책과 연필 몇 자루… 그것보다 은종이를 진짜 기분 좋게 했던 것은 우승을 했다며 자동차로 수용소까지 태워다 주는 것이 아닌가. 당시만 해도 진도에는 자동차가 없을 때였고, 은종이는 태어나서 처음 타 보는 자동차였다.
진도에서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김제에 피난민 농장으로 옮겼다.
국유지 800평을 얻어 개간하기로 했다. 은종이 몫이었다.
혼자서 삽과 괭이로 열심히 땀 흘린 결과 황무지에 옥수수나 고구마를 심을 수 있었다.
장종안 webmaster@ig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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