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증조부는 금산에서도 시골 마을인 제원 살던 가난한 선비였다고 한다. 5형제 중 막내로 서당 다니며 글은 제법 읽었지만 다른 재주는 없었던 것 같은데, 수저 두벌과 솥단지 하나만 갖고 장가를 들자 상황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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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택 원장 연세소아과 |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자 그제서야 농사일을 배우셨다고 한다. 농사의 기본인 지게질조차 하지 못해 일꾼으로서의 제대로 된 품삯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하니 결혼 후 고생이 심하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오죽하면 달밤에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곳에서 몰래 지게질 연습을 해야 할 정도로 고단하셨던 모양이다.
증조부 인생의 반전은 영동에서 금산을 거쳐 호남과 연결되는 영호남을 잇는 길에 사셨던 것에서 시작된다. 신작로변에 위치한 두 칸 짜리 집에 사시던 어른은 창고를 지어 이 길을 지나다니는 보부상의 짐을 맡아주는 사업(?)을 시작하셨고, 신용을 쌓은 뒤에는 그 물건 중 일부를 동네 사람들에게 팔아주고 구전을 먹는 것으로 기반을 잡으셨다고 한다.
말하자면 제원면 최초의 창고업과 소매점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부상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을 접한 어른은 서당 다니던 당신의 16세 외아들을 초등학교에 보내셨고, 그 외아들은 장남을 일본 유학 시키시면서 집안 역사가 새로워진다.
그 장남은 7남매를 서울 유학 시켰고, 장남의 장남이 바로 나인 것이다.
조선시대, 이리저리 떠돌며 물건을 팔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보부상(褓負商)이다. 봇짐장수 보상(褓商)과 등짐장수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라고 한다.
보상은 비단, 금은 세공품 등의 고가품을 운반하는 상인이고, 부상은 생선, 소금, 토기 등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다. 상품의 유통이 어렵던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는데, 내 조상님의 인생을 바꾼 사람들은 말하자면 부상(負商)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들 보부상이 무려 25만명이나 있었다고 하니 이들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고장 금산은 평화 시에는 한적한 산골짜기 아래 농촌마을이지만 어려운 시기에는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곤 했다.
백제 멸망의 과정에 신라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계백장군이 출정할 때 성충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탄현(炭峴)’의 위치가 진산면의 숯고개라는 주장이 있다.
금산이 자랑하는 최고 향토사학자 안용산 선생의 주장이다. 나는 이 주장에 절대 공감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되자마자 한양을 향해 진격하던 왜군이 방향을 틀어 들어온 지역도 금산이었다.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곡창인 호남평야로의 진출이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이었고, 대군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금산을 통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왜군이 침입하자 조헌 선생과 고경명 선생, 그리고 영규대사를 비롯한 임진왜란의 영웅들이 함께 힘을 합쳐 이를 저지하고자 한 전투가 바로 금산전투이고, 칠백의사의 장렬한 산화로 만들어진 칠백의총의 장엄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동학혁명 당시 최초의 기포지가 금산이라는 역사적 증명이 있고, 마지막 항전지도 금산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동학혁명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전환점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금산의 중요성은 언제나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공주와 고창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그들은 동학혁명의 최초 기포지를 고창 당산지역 등이라고 얘기하지만, 동학혁명 연구에 관한 한 최고 학자 중 한 분인 표영삼 선생은 금산에서의 기포가 더 빨랐음을 밝히면서, 1894년 3월 초(8일 또는 12일)에 금산에서 처음 깃발을 올렸다고 증언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표선생이 이 주장을 여러 학계에 널리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전봉준의 기포일이 3월 18일인 것을 생각한다면 열흘 가량 빠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 동학군들은 12월까지 항쟁했지만 금산 지역만은 1895년 1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끈질기게 싸웠다.
금산이 동학혁명 최초의 기포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보부상의 존재가 있다. 그들이 연락책이었고, 민심의 전달자였으며,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금산에 보부상 왕래가 빈번했던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금산이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철도와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동서의 소통이 아닌 서울과 지방으로만 연결되는 방식으로 유통이 바뀌는 바람에 금산은 인삼만으로 유명한 한적한 시골 마을이 되었다.
이제 인삼 종주지로서의 금산은 그 위상이 많이 낮아졌기에 인삼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최근 10여년 간 금산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다. 금산의 자존심인 인삼조합이 부여에 합병되는 치욕을 경험하기도 했다. 고등어가 참치를 먹어버린 것이라고나 할까?
최근에는 이 땅에 의료폐기물을 처리해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인간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참에 이런 쓰레기들을 한꺼번에 정리할 방도는 없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겨우 인구 5만 조금 넘는 작은 동네에서 얼굴 맞대고 살면서 적폐청산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 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방도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보부상의 전통을 되살리고, 교통 요충지로서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회복하면서 인삼이 아닌 건강 전체를 아우르는 건강수도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면 금산은 과거의 영화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새로 취임한 문정우 군수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른 것은 그동안 너무 피폐해지고 망가진 내 고향 금산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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