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유정(故鄕有情)

참 따뜻했다.
아니 포근하고 화창한 날씨는 춘3월의 마지막 날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장 따뜻한 설날로 기록되었다는 2007년 음력설.

제주도 유채꽃도 예년보다 1주일이나 앞당겨 꽃을 활짝 피웠다는 소식이 TV를 통해 안방에 전달되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대전에서 충주 가는 길은 그렇게 막히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요즈음 들어 역귀성이 늘면서 상경하는 차량도 무시못할 정도다.
회덕분기점 에서 중부고속도로 증평IC까지 가는 고속도로 길.
가장 붐빌 것이라는 설날 하루전 오전시간.

지체를 감수하는 마음으로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내려오는 길은 차들로 꽉 찼다. 하지만 큰 정체없이 다소 흐름이 느릴뿐 멈춤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짧은 연휴에 아마도 귀성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예년처럼 정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 생겨난 길도 많지만 그만큼 차량도 많이 늘었다. 그리고 정체를 피해 미리 미리 성묘와 세배를 다녀온 사람들도 있으리라.

삶의 의식도 많이 바뀌어간다.
명절때면 늘 고향에 오가던 사람들도 이젠 교통정체 때문에 꼭 설날만을 고수하지 않는 듯하다.

설전이나 후, 일요일이나 토요일을 택해 수월하게 오가는 사람들도 늘었다.

평상시 주말 교통 흐름 정도다.
막힘없는 고속도로.
여유로움에 따사로움, 막힘없는 질주는 고향가는 길을 더욱 너그럽게 만들어 준다.

차창을 열었다.
밖은 완연한 봄기운이 너울대는 기온의 날씨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기상예보는 비가 내릴것이라는 예측이였지만 맑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갈 뿐이다.
명절때 춥기라도 하면 성묘도 그렇고 도심 아파트에서 익숙해진 삶을 살아온 아이들의 고통도 무시 못한다.

재래식 화장실 출입도 그렇고 밖에서 세수하기도 벅찬 모양이다.

막히지 않는 길은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게 도착한다.
고향이다.

내가 나고 자란 그곳 마을이다.
겨울 농촌은 을씨년스럽다.
들녘은 그저 멈춘 생의 모습 그대로다.

논바닥엔 콤바인이 지나가면서 토해낸 볏짚들이 그대로 깔려있고 엊그제 내린 비 덕분인지 얕은 도랑엔 물줄기가 흐른다.

밭엔 거두어들이지 못한 고추 대궁이 그대로 말라 버린채 서있고 멀칭 재배를 위해 깔아 놓았던 비닐이 바람 타고 깃발처럼 펄럭인다.

이곳 충주까지 인삼재배면적이 많이 늘었다. 차광막이 검게 드리워진 밭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수익적으로 마땅한 밭농사가 보이지 않는 요즈음 특용작물재배나 비닐하우스가 점진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시장경제 원리다.

보리파종하고 감자심고 고구마 심던 우리 어릴적 농사방법으론 이제 그 효용성을 만족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단순 농사방법으론 손익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다.

물밀듯이 파고드는 수입 농산물, 시장 개방화 압력, 농촌인구의 고령화, 기계화 영농에 따른 비용증가 등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농촌의 현실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집 마당마다 한두 대의 차량들이 서있다. 벌써 타향에서 귀향한 자식들이 타고 온 차량들이다. 집집마다 분주한 모습들이다.
내일 차례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전을 부치고 떡국 끓이기 위한 가래떡 썰기.
만두 빚기, 식사준비 등 주방과 거실을 오가는 나이드신 우리어머니들과 젊은 며느리들.

신세대 새댁들이 어우러져 밝은 모습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명절 증후군 같은 얘기는 남의 얘기처럼 보여진다.
오랜만에 서로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우고 서투르지만 같이 음식준비를 하고 사랑채에서는 남자들이 술잔을 나누며 옛 어린시절 얘기로 꽃을 피운다.

밖으로 나왔다. 어릴적 자주 오르던 뒷동산에 오른다.
작은 나무와 칡덩굴, 가시덤불로 길마져 없어졌다.

마음대로 자라고 성장한 나무들로 산속은 빼곡하다.
높게 자란 나무. 그 사이에 새로 자라난 작은 나무.

그리고 누렇게 말라버린 숲.
그렇게 그들은 그들만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고부터 산은 이렇게 울창하게, 빼곡하게 변해 버렸다.

난방은 보일러가, 취사는 가스가, 소 죽은 사료가 대신하고부터 아궁이가, 아니 온돌이 시골집에서도 사라졌다. 그 당시 한 겨울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먼 산에 올라 나무를 해야했다.

구들장을 따뜻하게 덥히려면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 아니 나무는 식량과 함께 겨울을 나기위한 필수품이였다.

산에 오르는 길.
작은 무덤의 비석. 그리고 바위모습을 보고 이곳이 우리가 어릴적 오가던 곳임을 알려준다.
나무 모습으론 알수가 없다.

성장하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커보이던 바위. 지금 다시 보니 참 작게만 느껴진다. 그 당시 눈높이로 보아야 하나보다.
나뭇가지를 피해, 가시덤블을 넘어 뒷동산의 맨 꼭대기 정상에 올랐다. 없어진 길을 만들며 올라야 했다.

저 아래 남한강이 눈에 들어온다.
충북선 철교가 보이고 그 위쪽에 충주댐이 눈에 들어온다.

변하지 않은 것은 충북선 철교뿐이다.
댐 완공으로 흐르는 물줄기도 좁아졌다. 발전할때만 물줄기가 넓어졌다가 그저 적은 수량으로 조정지 댐으로 흘러드는 모습이다.

옛 충주비료공장의 요소탑도 이젠 다른 공장으로 변해 버렸다. 요소탑. 그 모습만이 아직 건재할 뿐이다. 그래도 우리 어릴적엔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화학공장이었는데…
그 시절 영화는 어디가고 그 자리엔 그 당시 흔적만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저 멀리 기적소리가 들린다.
기관차 1량에 객차 4량. 무궁화열차다.
경부선 열차에 비하면 정말 꼬마열차다.

유럽 알프스 등산열차나 일본 하코네 국립공원을 오르는 열차처럼 작게 보인다.
저 열차 속에도 이름모를 승객이 꿈을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선물 꾸러미를 안고 유유히 달리는 열차 속에서 곧 만날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희망 찾아 가는 길. 부푼 꿈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덜커덩 덜커덩 빠~앙’
열차는 쉼없이 달린다. 기차길옆 오막살이 동요가 머리를 스친다.

강변도로를 달리는 승용차들.
그 사이 느린 시내버스도 합류했다.

그저 정겨운 풍경이다. 산넘어 산이 있고 그사이 강이 흐르고 산자락 평평한곳에 마을이 형성됐다.

우리 어릴적엔 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나이드신 분들만이 명맥을 이어가며 마을을 지키고 계신다.

산을 내려와 마을 어귀로 발걸음을 옮긴다.
동네의 수호신 ‘느티나무’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다.

느티나무도 나이가 들면 성장을 멈추는 것일까? 어릴적 그 모습 그대로인듯 싶다.
나무 아래는 여름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동네 소문의 진원지가 되기도 하고 장날엔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제 꽃피는 봄날이 오면 저 나무가지에도 연녹색의 새순이 파릇파릇 돋아날것이다.

마을회관 경노당에서 어르신들을 뵈었다. 세배드리고 두부를 안주로 막걸리를 대접해 드렸다.
내 어릴적 청·장년의 모습으로 동네 삶을 끌고 가시던 어르신들.

머리모습은 하얗게 변하고 얼굴엔 삶의 주름이 머물렀다. 세월의 주름은 어쩔수 없나보다.
볏가마를 어깨에 메고 어떤 일이든 당차게 하시던 분들이었는데 이젠 가냘픈 어깨 모습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동네에는 빈집도 점점 늘어난다.
바람에 문이 열리고 닫히고 내리는 여름 장마에 기왓장도 내려앉으니 집마져 내려앉을 듯하다.
저 집에 내 친구가 살았었는데 내년 이맘때쯤엔 집 모습 보기도 힘들것 같다.

고향 찾은 친구들과 소주 몇 잔 나눈다.
캄캄한 밤하늘.

시골 밤은 너무 조용하다 못해 한적하다.
별들이 뜨고 바람은 나뭇가지에서 운다.
고향에는 그래도 아직 정이 있다.

나를 포근히 감싸는 그 무엇이 남아있다. 늘 가슴으로 느끼는 그런 정이 있어 좋다.

고향유정(故鄕有情).
늘 내가 느끼는 명절날의 고마움이다.

금산신문 webmaster@ig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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