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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칼럼 최한용과 茶한잔의 여유를…
부치지 못하는 편지/ASA공장장 최한용

그날 오후부터 비가 무척 내렸습니다. 오전내 청명하던 초가을 날씨는 바람이 불더니 구름이 몰려오고 어두운 하늘에선 한 방울 두방울 비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한시간후 빗방울은 굵어지면서 온 대지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졸음이 눈을 가릴 때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이상한 마음이 나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로 전무님의 부음을 통고 받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잘못된 전화이기를 바랬습니다. 이렇게 빨리 가시다니 수화기를 놓고 한동안 멍하니 초점 잃은 눈으로 비 내리는 창가를 응시할 뿐이었습니다. 하늘도 슬퍼서 비를 내리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거꾸로 손꼽아 세어보니 돌아가시기전 마지막으로 뵈은지 꼭 18일째 였습니다.
그날 뵈은게 이생에서의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폐암 말기의 고통 속에서도 밝은 표정으로 맞아 주시고 침상에서 불편 하셨겠지만 일어나셔서 손잡아 주시던 모습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서 쾌유되시기를 빌어드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후 사모님과의 대화에서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호스피스 병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빨리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호스피스(Hospice Care)!
말기환자와 그 가족을 전인적(全人的)으로 돌보는 프로그램. 호스피스는 생의 마지막 순간들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고 또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들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돕고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도 그날 알았습니다.

전무님!
다시 불러 드리며 처음 뵙던 시절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1976년 11월. 제가 「H」社에 처음 입사해서 신입사원 기본 교육을 마치고 부서 배치를 받았을 때 저의 課長님이셨습니다.

군제대하고 복학해서 1년 학교 다니며 졸업전 취업이었기에 저는 회사의 업무는 물론 조직생활의 근본도 잘 모르던 시절 이였지요, 촌닭을 읍내 장에 내다 놓은 것처럼 늘 머쓱하고 어정쩡한 시골뜨기였지만 과장님은 늘 조용하게 자상하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다음해 대전공장 건설 본부 프로젝트가 구성되면서 다른 유능한 사원들도 많았지만 저를 그 구성원으로 뽑아 주셨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가 참 열심히 일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일요일도 거의 매주 회사에 출근하셨지요 사원들이야 밀린 일도 해야했고 휴근 수당도 받을 수 있었지만 과장급이상은 휴근 수당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과장님과 저는 대전으로 내려와서 공장건설 업무에 임했지요, 저야 총각시절이라 괜찮았지만 과장님은 토요일 오후에 늦은 기차편으로 서울로 올라가셔서 가족과 만나고 다시 월요일 아침 첫 기차로 내려오시곤 하셨지요.

그렇게 하시면서 외국 출장시에 자주 동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셨고 그 기회 때마다 어학의 필요성과 국제 감각, 비지니스매너에 관한 상세한 교육을 실제로 체험 할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성장한 자신의 밑바탕이 되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저도 결혼을 했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늘 가족 소식을 물어 보시곤 하셨지요. 전무님이 영등포공장 공장장으로 전근 하셔서 2년간 근무하신 기간을 제외하면 근 20년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진리는 하나다. 늘 성실하게 근무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제 자신이 조직에서 성장했다기보다 늘 이끌어 주시고 보살펴 주신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전무님은 저뿐만이 아닌 모든 직원들 아니 모든 협력업체 대표들까지 모두 좋아 하셨습니다.
늘 소탈하시고 정이 많으신 성격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3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출가시키시고 이제 손주·손녀의 재롱으로 늘 즐거우셔야 할 전무님이 「H」社를 정년 퇴임하시고 우연히 들린 병원 검진에서 폐암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의 고통과 수술 후유증으로 잠시 요양하시다가 상태가 호전되어 저희들이 한번 찾아 뵈었을때 그토록 건강하셨는데 그로부터 5년후 이제 영영 돌아 오실 수 없는 길을 가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밟습니다.
영생할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무님은 너무 아쉽습니다. 늘 일만 하셨고 그 흔한 물놀이도 가족과 함께 가신 적이 없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두를 성취하셨고 손주 손녀의 재롱 받으시며 여기 저기 여행하시면서 아름다운 노후의 나날을 보내셔야 할 때인데 이렇게 먼저 돌아 오실수 없는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너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은 달라도 누구나 죽음이란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누구나 미지의 여행을 할 때면 안내 받기를 원합니다. 죽음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서로 다른 삶을 마감하고 육신의 한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죽음의 저편에도 영원한 삶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삶 속으로 먼저 가신것 뿐입니다.

부음 소식을 듣고 비내리는 서울 길을 달렸습니다.
멀게만 느껴지던 삼성서울 병원 영안실.

조화 속에서 웃음짓고 계신 영정 사진을 보고 말 못하는 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향을 사르고 엎드려 절하며 같이 모셨던 20년의 세월이 영화의 필름처럼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사모님 세자녀와 사위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렸을때 많이 보아왔던 따님들이 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무슨말로 슬픔을 위로해 드려야 할지 말문이 막혔습니다. 사모님은 겉으론 담담해 보이시려 노력하셨지만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저는 보았습니다.

어제 사모님 전화를 받았습니다.
황망중이실텐데 전화를 직접 주셨습니다.
관심같고 찾아 주어서 고맙고 주변 사람들에게 대신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해 달라는 부탁이셨습니다.

전무님은 가셨지만 애·경사시 꼭 연락하라시면서 혹시 이사 갈줄도 모르니 핸드폰 번호를 또박또박 다시 알려 주셨습니다.

전무님, 다시 밖은 맑은 가을 하늘 입니다.
이생에서 못다하신 여유로움을 병마 없는 하늘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요, 남은 가족 분들께 가끔 소식 드리겠습니다.

영전에 가을 국화 한 송이 올림니다.
영면하시옵소서…

최한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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