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장마철이 시작되었다지만 지루한 비는 아닌가 보다.
가끔 구름사이로 햇살이 내린다. 혹시나 해서 비옷을 챙겨 산(山)에 오른다.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달구어진 대지가 어제 내린 빗물로 식었나 보다.
비 내리기 전날 후덥지근하던 그런 날씨가 아니다.
바람이 정말 청량하다.
빗물에 세수한 초록은 한결 싱그럽고 지나는 바람은 초록 이파리 물기를 닦아 주었나 보다.
산 전체가 싱그럽고 풀내음 향기가 넘실넘실 번진다.
오르는 산길도 먼지 나지 않아 좋다.
새들도 즐거운 모양이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들려주는 그들만의 소리가 더욱 밝은 모습이다.
자주 다니던 산길도 늘 새롭다.
아니 자주 오르는 산도 올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다.
초록의 빛깔, 나무들과 숲의 성장 모습이 한 여름엔 일주일만이라도 몰라보게 달라진다. 커진다.
감나무가 있는 것을 보니 예전에 산자락에 있던 집터였나 보다.
그리고 그 옆엔 자귀나무 한그루, 공작새 같은 예쁜 색깔의 꽃을 피웠다.
울타리 지주목이었나?
세월의 등을 걸머진 마른 고목엔 능소화가 줄줄이 주황색 꽃을 활짝 피웠다.
덩굴 형태의 여름꽃 능소화.
옛날 “소화”라는 여인이 님 향하는 사모의 정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영혼이 꽃으로 피어났다는 아름다운 꽃, 하지만 그 꽃엔 독이 있어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으려 한단다.
산길을 오르는 중에 만나는 옛 생활터전.
우리 어릴 적엔 식량부족으로 먹고 살기 위해 경사진 산자락도 불을 놓아 밭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화전이었다. 돌 많고 경사가 심해 사람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심을 수 없었던 곳.
그곳에서 나무뿌리를 캐내고 돌을 주워내 밭을 만들고 감자, 고구마 등을 심었다.
늘 식량이 걱정이었고 ‘보릿고개’란 말이 그 당시 만들어진 단어다.
먹을거리 해결이 최우선이었다.
이젠 산자락에서 그런 경사진 화전답을 찾기 어렵다.
식량이 그만큼 풍성해졌고 삶의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준화되었다.
농촌 인구는 줄어들고 도심으로, 도심으로 모여든 사람들.
산업화가 우리 경제의 주체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젠 그 산자락 화전답은 이름모를 나무와 숲으로 빼곡히 메워졌다.
사람이 산에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다.
감나무같은 과실목이 없다면 옛 살림터였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무심코 지나면 그런 모습에 대한 상상도 어려울 것이다.
산(山)에 오르면 또 다시 느끼는 그런 감정이 있어 좋다.
비 내린 다음날, 너무 청량하고 바람 시원해서 좋다.
산이 있어 행복한 날이다.
우리나라엔 참으로 산이 많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말한다면 전국이 산 너머 산이다.
그 산계곡마다 물이 흐르고 그 물은 모여서 큰 강을 만든다. 산 있고 물 있으니 여름날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뜨거운 모래사장, 넘실대는 파도도 좋겠지만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계곡에 발 담그고 있으면 무엇이 부러우랴.
이제 7월이다.
7월은 휴가가 있어 즐거운 계절이다.
더위를 피해 잠시 일탈해 보는 휴가.
올 여름은 어느 산, 어느 계곡이 좋을까?
사치스런 고민을 할 때가 된 듯하다.
어디로 갈 건지, 누구와 함께 갈 건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건지 하는 고민이 행복스럽기만한 여름이다.
오랜만에 시골 고향을 찾아가 보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 어릴 적 풍경을 지금은 만나기가 어렵다.
우선 그 흔하던 원두막이 없어졌다.
길가 참외밭도 없다. 수박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수박사려, 참외사려” 반복되는 스피커 소리만이 작은 트럭에서 울려지고 있을 뿐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2층으로 높게 지어진 원두막 그곳엔 멍석이 깔려 있었고 나이드신 할아버지가 넓은 밭을 늘 지키고 계셨다.
장날이면 늘 오가시던 우리네 어르신들이 들러 참외도 사먹고 삶의 얘기도 나누시던 곳이다.
전기불이 없으니 선풍기는 물론 없었고 넓직한 큰 부채만이 바람과 파리를 쫓는 유일한 기구였다.
밤엔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고…
요즈음 참외나 수박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전문적으로 재배된다.
제철보다 일찍 출하를 목적으로 대단위 단지에서 재배되고 농협을 통해 전국적으로 팔려 나간다.
맛도 중요하지만 브랜드 개념의 상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모든 것이 전문화, 체계화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원두막 보기도 힘들지만 강가나 흐르는 물에서 미역 감는 아이들 만나기도 어렵다.
물론 핵가족화 바람에 아이들이 적기도 하지만 대부분 도심으로 이사 와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시골엔 아이들이 거의 없다. 교육 열풍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어릴 적처럼 한가롭게 매미잡고 개천에서 풍덩거리며 물놀이 할 시간도 없다.
학원에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방학 중에도 바쁜 아이들이다.
설령 시간이 있다고 해도 물놀이 보다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집 밖을 나오려 하지 않는다.
곤충채집, 식물채집 같은 방학숙제는 우리들 세대가 끝이 되었나 보다.
곤충 잡으러, 식물채집하러 뒷산에 오르고 저녁 방죽을 매미채 하나들고 뛰어다니던 시절.
이젠 그 모습에 대한 상상만이 머리에 남았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에 묻혀 살고 자연과 함께 했던 그 시절.
삶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기만 했다.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나도 이제 나이가 제법 되었나 보다. 지난 것은 모두 아름답다.
괴로웠던 일상의 삶이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된다.
아-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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