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저편에 가만히 묻혀 있는 시간이 아니라 때도 없이 살아나 마음에 자꾸 새겨진다.
불청객처럼 멋대로 불쑥 들어오니 피할 길이
없다.
전쟁터에서 예고도 없이 폭탄이 날아와 터지듯 지나간 기억은 느닷없이 밀고 들어와 사람을 얼얼하게 만들어 놓고 간다.
내가 고달팠던 일보다 주변사람을 힘들게 한 일이 늘 떠오른다.
그때는 그들을 힘들게 하는 줄 잘 몰랐는데 훗날 그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나 잘 알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
마음은 시간과 함께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지나왔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현실에서는 딱 한번 흘러간 시간인데 마음은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또 되돌아간다.
현실은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
뒷날 두고두고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무섭고 중요하다.
물레방아에 몸이 메인 소처럼 마음은 한 번 살았던 현장을 뱅글뱅글 다시 돌아
간다.
그러면 나한테 상처받은 사람, 나의소홀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 그 상한 마음을 그대로 앓으며 기다리고 있다.
나의 분함이나 아쉬움이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탓 이었던 주위 사람의 고통이 나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었던 주의 사람의
고통이 나를 지난 날로 끌어들인다.
내가 그가 되어 아픔을 준다.
마음에는 기계처럼 맹목적으로 혼자 돌아가는 부분이 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고 그 고통을 뒤늦게 덜어주라고 방아처럼 쿵쿵 짓찧으며
자꾸 사람을 과거로 끌고 간다.
사람의 도리는 외부에서 주는 도덕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져 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고 상하게 한 사람들이었다면 지난날로
되돌아가서 그들의 고통을 받아오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과거와 함께 대개 잊어버린다.
그 사람들이 나를 아끼고 사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로 하여 그들이 아팠던 것이
아프다.
과거 위에 환상(幻想)의 빛깔로 눈부시게 덧칠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도금은 하고 또 해도 과거는 그것을 깨고 원래의
아픈 빛깔이 조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살아난다.
어느 날에나 윤희 같이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는 이 회상(回想)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거의 회상은 현실에서 윤회하여
기억속에 되살아나지만, 그러나 그 윤회의 사슬은 죽음으로 청산되는 것인가.
죽음의 기운이 다가들면 회상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것일까.
묘는 사람의 육신을 묻는 곳이라기보다 회상을 묻는 곳이리라.
지난날의 빚은 죽음에 의해서나 겨우 갚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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