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글이감 - 금산신문

신선한 충격(I)

금산에서 소아과 의원을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내가 처음 개원했을 때 진찰하던 아이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애를 낳아 다시 부모로 나를 찾는 경험을 한 것도 여러 번이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한다. 생각 하나는 ‘소아과 의사로서 내가 돌보던 아이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를 데리고 병원을 찾아오면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라’하시던 원로 교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어느새 소아과의사로서의 수명이 적어도 절반은 지나갔다. 두 번째 생각은 나이 먹어가는 의사의 보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웅변학원을 운영하던 김 진 원장을 통해서 우연히 금산중학교 2학년 박준세 학생의 글을 접하면서 나는 또다른 감동을 맛보았다. 그 글을 읽으면서 ‘금산에 이런 문재(文才)를 가진 아이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 아이가 어려서는 병치레가 잦아 부모 걱정 많이 시키더니 어느새 이처럼 자랐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혼자 보고 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이어서 금산신문 애독자들에게 소개하려 한다. 이 글을 전하면서 내가 띄어쓰기와 철자법에 맞지 않는 작은 부분 몇 가지 손 댄 것 이외에는 박준세군의 글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말을 미리 드려야 하겠다. 마치 누군가 어른이 손을 봐준 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분이 계실까봐서 말이다.

아직 커나가는 학생이라서 문맥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눈에 띠기는 하지만 인터넷에 적응되어 단문(短文) 이외의 글을 쓸 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이 보고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게다가 이 글들 중 <쭈글이감>은 농수산식품부가 주최한 ‘나의 농어촌 이야기 전국 수기 공모전’에서 은상을 획득해서 상장과 30만 원의 상금까지 받은 작품이고, <내 고향 황풍리>는 농어촌공사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이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면 관계 상 또 다른 글 <내 고향 황풍리>는 다음 주에 소개하려 한다. - 김호택 -

박준세

어제 저녁 논술 원장님이 빌려주신 ‘리버보이’라는 책에 푹 빠져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반바지만을 입은 채 잠이 들었다.

우습게도 꿈속에서 떨어지는 순간 깜짝 놀라 일어나보니 4시 밖에 되지 않았다. ‘떨어지는 꿈 꿨으니까 이제 키 좀 크겠지…’하며 피식 웃다가 밀려오는 피로에 다시 잠을 청했지만 올해에는 여름더위가 왜 늦은 지금이야 극성을 피우는지 새벽잠을 설치다 결국 이른 아침 강아지와 산책을 하기로 결심했다.

모기한테 물려 부은 얼굴을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지만 밖에 나가보니 자욱한 안개가 내 얼굴에 스며드는 상쾌함에 푹 빠져버렸다. 옆에 있는 우리 집 강아지도 시원한 듯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잠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이 녀석 너도 시원하냐?” 하며 헛웃음 치며 어디를 갈지 곰곰이 생각을 했다.

마땅히 가 볼 곳도 없었지만 문뜩 얼마 전 친구들과 매미를 잡은 나무가 생각나 한번 가보기로 했다. 맴맴 울던 매미 소리도 언제부턴가 사라져가고 안개 속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나무, 매미가 울던 자리에는 매미 대신 노란 갑주백목이 보였다. ‘어, 감나무였잖아? 근데 저 감‥ 나중에 홍시가 되면 내가 먹어야지’ 생각하던 중 내 머리에 스치는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아‥ 맞다 할머니!’ 우리 할머니 생각이다. 금산 작은 시골마을 부리면에 사시는 우리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 때 생을 마감하셨지만 나에게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신 분이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도 나와 함께 9월 추석이 다가오면 자동차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친척들을 만날 수 있는 기쁨과 기대로 할머니 댁에 찾아갔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을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신 노인 분들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면 나는 자동차 창문 사이로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 소리쳤다. 할머니 댁에 친척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히히 역시 내가 1등이야. 친척들이 오면 놀래켜 줘야지’하며 숨을 곳을 찾아 눈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차에 내려 할머니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나와 “할머니!”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아이고 내 새끼 왔어?” 하며 나를 꼭 끌어안아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셨다. “할머니 숨이 막혀요” 하며 옆을 바라 볼 때면 대문 옆에서 오뚝히 마당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 감나무는 나뭇잎을 쉬아쉬야 흔들며 나를 맞이해 줬다.

“할머니! 친척들 오기 전에 몰래 산책가요”하며 내가 할머니 손을 잡고 부탁하면 부모님의 웃음 섞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산책을 가면 높고 높은 하늘아래 자유롭게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잡겠다며 내가 기진맥진 할 때까지 달리면 할머니는 같이 가자며 저 멀리서 웃으셨다.

친척들이 오면 부모님과 삼촌들은 한 담요 아래 맛나는 과일을 먹으며 서로 자식 자랑도 하고 재미있는 담소도 나누시며 웃으셨다. 그동안 나는 내 또래 친척들과 함께 할머니 댁 앞에 있는 또랑이 뭐 그리 좋다고 부침개 입 터지게 물고 왔다 갔다 하며 정신없게 뛰어놀았다. 어디서 피라미 한 마리 다가오면 그거 잡겠다고 오두방정 떨며 다함께 물에 빠졌다.

그러다가도 할머니께서 친척들과 장난으로 하신 고스톱을 해 이기시면 그 돈으로 가서 눈깔사탕을 사먹으라며 주신 100원을 가지고 그저 기뻐 뛰어다니던, 철없는 내가 배고프다고 할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면 할머니는 어디선가 긴 대나무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는 감나무에 수많이 열린 감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홍시 하나를 선택해 툭툭 치시는 동안 나는 감나무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사슴벌레를 잡는다고 옆에 있는 작은 나뭇가지로 툭툭 건드렸다.

할머니가 감을 따 나한테 하나 주면 나는 “할머니! 이거 쭈글쭈글해 히히 꼭 할머니 같아, 그럼 이건 쭈글이 감이네”하고 웃으며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할머니의 주름진 손은 쭈글쭈글한 손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스한 손이었다. 또 내가 감을 따본다고 하면 할머니는 대나무를 건네주시고 나를 지켜보셨다.

내가 대나무를 들어 하늘을 봤을 때 정말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구름 한점 없는 높은 하늘 아래 감나무에 잎은 없었지만 햇빛이 감을 더 탐스럽고 빨갛게 만들어 주었고 할머니댁 앞에 흐르는 물소리까지 더해져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가 나의 눈과 귀를 촉촉하고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 나도 모르게 감을 떨어뜨려 얼떨결에 할머니 얼굴을 보면 주름 속 그윽한 웃음으로 나를 다시 웃게 해줬다.

감을 다 따고 친척들과 함께 감을 먹을 때면 친척 동생과 나는 서로 자기가 땄다며 자랑을 해댔고 아까 할머니가 딴 쭈글이감이 할머니와 닮았다고 내가 말하자 모두들 똑같다며 포복절도 했다.
그렇게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성묘 갈 시간이 되면 사촌들과 나는 누가 더 빨리 산소까지 가는지 내기를 했다. 10분 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산위에서 할머니 집은 어떻게 보일까 궁금해 뒤를 돌아봐 할머니 집을 보면 작은 집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감나무의 감은 빨간 점으로 뚜렷하게 보였다.

조금 더 가다 증조할머니 산소에 도착해서 절을 하는데 또래 친척들 얼굴만 봐도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키득키득 거리다가 결국 큰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은 기억이 난다.

절을 다 끝내면 나는 꼭 가시덩굴 있는 방향으로 갔다. 그곳에도 한그루의 멋있는 감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시덩굴 때문에 힘들었지만 겨우 겨우 겨우 딴 감을 보면 가시에 찔린 고통이 사라지고 웃음이 피어났다. 누가 먹을세라 나는 감을 아버지 차에 꽁꽁 숨겨두어 할머니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안전하게 감을 지켰다.

할머니에게 “이 감 내가 손으로 딴 감이에요”라고 자랑하면 할머니는 잘했다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 이제는 할머니를 볼 수 없지만 잠시 동안 잊혀진 감나무에 얽힌 할머니와 나의 추억을 이 글로 씀에 따라 더 이상 이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또 다른 추억 하나 하나를 생각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그저 천방지축 애교와 장난만 심해 할머니에게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지금까지 할머니께서 살아계셨다면 자주 찾아가 어깨도 주물러 드리고 맛있는 감도 따 드렸을 텐데… 그렇게 할머니를 생각하다가 노인공경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던 중 요즘 날이 갈수록 농촌에 계시는 노인분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꼭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이 아닌 일요일이나 쉬는 날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짊어지었던 짐을 농촌에 잠시 내려놓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곁에서 쉬어가며 도시에서 맛볼 수 없었던 기쁨과 행복을 쌓아 나처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드는 것도 노인의 소외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며 더불어 조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이다.
만약 나처럼 조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까운 시골마을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좋은 농촌 체험기이다.

금산신문 webmaster@ig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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