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소리(47) - 금산신문

진웅기(1931-2005) /수필가

시내버스 속에서는, 옆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 태도는 말하자면 도시인의 첫째가는 에티켓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꽉꽉 쟁여진 채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같이 가면서 누구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법이 없고 입 한 번 달싹 하지 않는다. 마치 이 도시 전체에 무슨 무거운 함구령이라도 내려져 있어서 그것을 어기면 당장 큰일이 나는 것처럼.

그래서 혹시 옆 사람에게 행선지에 대해서 물을라치면, 겨우 한 두 마디 얼른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물어본 사람도 잘 못 알아들은 채 역시 무안하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렇게 오래 침묵하고 있으면 입이 근지럽지도 않은지. 이런 침묵의 공간을 메워주기라도 하듯이 차 속에서는 스테레오가 꽝꽝 울려댄다. 전체주의 나라의 요란한 선전 구호인 양. 무표정한 사람들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은 외국사람들처럼 보인다.

하기야 날마다 타고 다니는 출퇴근 버스가 시골 장날 버스 같이 시끌벅적하다면 그것 또한 피곤한 노릇이겠다. 사람들은 날마다 정력을 길에 깔면서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므로 지쳐서 서로 말을 건네기도 귀찮으리라. 하여튼 버스 속에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다는 자체는 도시인다운 쌀쌀한 멋을 모르는 사람으로, 금방 그가 시골사람이라는 광고라도 되는지.

사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는 사람들의 그 기이한 침묵이 어쩐지 멋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특히 잘 차려입은 젊은 여인의 유별나게 새침한 표정이 우아하게 비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이 없는 사람들은 스카치테이프로 입이 봉해져 있는 듯이 좀 딱하게 여겨졌다. 어쩌다가 저렇게 입에 모두 재갈들이 물렸는지.

‘그야 도시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넌덜이가 나 있지요.’
그러나 혹독한 추위가 여러 날 밀어닥치고 있다면 아무리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무슨 서슬에 날씨 이야기가 한두 마디쯤 나올 법도 하지 않는가.

이따금 펑펑 터지는 대형사건에 어수선하다면, 아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궁금증을 참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 물어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을 만도 하련만. 그러나 버스 속에는 보이지 않는 압제자가 있어 누가 입을 여나 하고 눈을 번뜩이기라도 하는지 차가운 침묵이 달리는 공기 속을 위압적으로 흐른다.

이런 대중교통을 타고 가다가 혹시 차 사고가 나서 누가 유리파편에 다치기라도 하면 옆 사람 중에 와이셔츠라도 찢어 처매 줄 사람이나 나올런지. 아니면 모두 안 다친 행운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저 총총히 사라지지는 않을지.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를 타고 다니던 나는 요전에야 침묵의 진짜 원인을 알았다. 그날 언뜻 이렇게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앉아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 싶어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자 두리번거리는 눈길은 금방 여러 저항의 시선에 부딪쳤다.

‘엇, 당신 왜 기분 나쁘게 사람을 쳐다봐?’
‘당신, 내 지갑을 노리는 치기배 아냐!’라고 시선들은 대드는 듯했다. 저 뒤쪽에 탄 어떤 청년은 손잡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여러 팔뚝 사이로 노골적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순간 내가 소매치기로 오인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러니까 혹시 누가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항상 승객들 사이에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사람들은 입만 다물고 있는 경건함이 아니라 시선도 매우 조심스럽게 간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거나 응시하지 않는다. 그런 판이니 옆 사람에게 말이라도 건다면 무슨 수작이라도 거는 치한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사람들은 말하자면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오’라는 표시로 그렇게 조가비 같이 굳게 입을 다물고 간다.

그런데 도대체가 이 많은 사람들이 겨우 몇 명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불한당 앞에서 왜 이토록 주눅이 드는가. 겁 많은 사람들에게 차차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러자 며칠 전에 읽은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버젓한 대낮에 큰길에서 날치기가 여자의 팔에 상처를 입히고 핸드백을 낚아채어 달아나는데도 쫓아가는 용감한 시민 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버스 속의 사람들도 물건을 빼앗기면 누구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고독감을 느끼는가. 그 무력증으로 겁을 먹고 저렇게 입들이 무거운가.

그러면 시민들이 그렇게 저마다 혼자가 된 애당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악한을 비난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옹호하는 시민윤리를 까먹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 혼자 무사하면 됐지 남이야 당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도시인들은 언제부터인지 악에 대하여 함께 저항하기를 그만두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 악은 너무나 거대하여져서 그저 무서워하며 피해 다닐 수밖에 없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손잡이에 쭉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이 내 눈에 ‘서울 촌놈’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승객들에게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그 보이지 않는 도둑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정체를 한 번 보았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런 소원은 곧 이루어졌다. 어느 날 어두워가는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 근처에 M출판사가 이사를 왔다는데 어디인가 하고 그럴만한 건물을 찾느라 고개를 옆으로 튼 채 얼마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저 앞쪽에서 신사 하나가 호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고 뭔가를 열심히 뒤지며 마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워지면서 내가 좌로 비키면 그도 좌로 비키고 우로 피하면 그도 우로 피하다가 우리는 정면으로 꽝 부딪쳤다.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어이구, 선생님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요”하고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굽신굽신하면서 바삐 걸어가버렸다. 쌀쌀한 얼굴들의 도시인답지 않은 그의 싹싹한 태도에 나는 하나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혹시나 싶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홀라당 비어 있었다. 거기에 들어 있었던 외상 책값 계산서며, 명함이며, 잡동사니와 얼마의 돈이 깨끗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내 외상 책값이나 갚아 주었으면….’

어처구니없는 자들로 인하여, 겨우 그런 족속들에게 승객들의 입이 재갈에 물리다니! 그 뒤로 나는 가끔 버스 속을 휘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내 주머니를 노릴 만한 괴한은 없나 싶어서였다. 그러면 나라는 보이지 않는 수사관 앞에서 승객들은 행여나 소매치기로 오인 받지나 않을까 하고 잔뜩 몸들을 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옆 사람에게 말도 걸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지도 못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역시 지루하고 피곤하다. 그리하여 요즘은 무슨 따분한 의식(儀式)에 참석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가끔 든다. 많은 사람들이 비좁은 사각형 공간에 서거나 앉아 모두 가만히 있다. 그러면 그 군중의 머리 위에 어떤 알지 못할 거대한 힘이 와서 내리누르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의식이 빚는 최면술(催眠術),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데 여러 사람이 엄숙하게 늘어서 있으면 그 머리 위에 무언가 무거운 힘이 들어차 있는 듯한 분위기. 그것은 버스 속에서만 작용하는 최면이 아니라 이 도시 전체 위를 내리누르는 무슨 그런 표독스런 힘이 군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도시에 살면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고 버스를 타면 빌딩 숲 위에서 제압하는 지배력의 군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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